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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의 온도

by 정성균

두 주 전 토요일이었다. 모처럼 일정이 비었고,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조카가 사는 동네 근처였다. 일부러 찾아갈 계획은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유난히 따르던 그 아이가 문득 떠올랐다. 멀리 서라도 얼굴이나 볼까 싶어 전화기를 들었다.

"집에 있니?"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오세요, 이모부."

어쩌면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차를 마치고 계단을 올라 현관 앞에 섰을 때, 문을 열어준 아이의 얼굴엔 해맑은 표정이 여전했다. 유치원생 시절 장난감을 들고 달려오던 그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처음엔 뭐 별 얘기가 아니었다. 직장생활은 어떤지, 첫 월급은 뭐에 썼는지, 동료들하고는 잘 지내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우리는 그 속에서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편안한 공기였다.

그러다 문득 조카가 창밖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모부, 혹시 말투 때문에 기분 나빴던 적 있으세요?"

질문은 느닷없었지만, 말투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봤다. 눈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이야기는 조용히 시작됐다.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던 순간, 옆자리 선배가 건넨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이거 복사 좀 해줘."

그게 전부였다. 명령조도 아니었고, 감정이 실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뭔가 이상했다는 거다.

"그냥…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어요. 내가 꼭 그런 일만 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날 하루 종일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되고, 다시 생각할수록 뭔가 껄끄러웠다고. 퇴근길에는 괜히 짜증이 났고, 집에 와서도 어딘가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았단다.

"제가 너무 예민한 걸 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그런 기분, 있잖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 누구나 겪지만, 막상 말을 꺼내면 괜히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그 모호한 불편함.

그날 밤, 조카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나 전달법’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심리학 개념인 줄 몰랐단다. 그냥, 누군가 블로그에 쓴 글을 따라 읽다 보니 마음이 정리되기 시작했다고.

"'너는 왜 그래?' 대신에 '나는 이렇게 느껴졌어'라고 말하는 방식이래요. 말할 때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내 감정을 중심으로 말하는 거죠."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카의 입을 통해 들으니 훨씬 또렷하게 다가왔다. 말은 이미 알고 있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조카는 말을 이어갔다.

"그 선배가 그냥 ‘복사해 줘’ 대신에, ‘복사해 주면 제가 일찍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냥… 느낌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전자는 나한테 시키는 느낌이고, 후자는 같이 일하는 느낌."

아, 그렇구나. 나는 조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회에 막 발을 디딘 초년생이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뭔가 찡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조카는 스스로의 말투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고 했다. 바쁘면 말이 툭 튀어나오고, 친하면 괜히 말이 거칠어지기도 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단다.

"가능하실 때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간 괜찮으실 때 말씀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처음엔 어색했다고 한다. 익숙한 말투를 바꾸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이 바뀌자 본인의 기분도 달라졌단다. 뭔가 덜 지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주변 사람들의 태도 역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회의할 때도, 팀플 할 때도, 사람들이 말을 훨씬 다정하게 받아주더라고요. 말 한마디 바꿨을 뿐인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평가받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스스로 말의 결을 살피고, 다듬고, 부드럽게 바꾸려고 애쓴다는 게 참 기특했다.

"사실 저도 말투가 딱딱하단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바쁘면 말이 짧아지고, 피곤하면 말이 퉁명스러워지고. 그런데 그걸 조금씩 바꿔보니까 저도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툭툭 내뱉은 말들. 별생각 없이 던졌지만, 듣는 입장에선 서운했을지도 모를 말투. 떠올릴수록 조금 미안해졌다.

"지금 바로 해주세요."
"이건 왜 아직도 안 됐죠?"

이런 말들 대신,

"시간 괜찮으실 때 함께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진행 중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궁금해요."

말은 결국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부드럽게 다듬으면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이어진다.

조카는 그날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던진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말투라는 건… 내가 알아채기 전에 바뀌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찌르기도 하잖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길게 드리운 내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나눈 수많은 말들. 그 안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었는지, 이제야 하나씩 되짚어보게 된다.

다음엔,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하고 싶다. 급하게 내뱉지 않고, 그 말이 어떤 결로 닿을지 잠시 생각한 뒤에. 그래도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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