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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신발 이야기

그 신발은 당신의 것이 이니었습니다

by 정성균

우리는 저마다의 틀 안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틀은 때로는 익숙하고 편안한 집과 같지만, 어느덧 발을 짓누르는 불편한 족쇄처럼 걷기 힘들게 만들곤 합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지금 신고 있는 이 갑갑함이 어딘가 껄끄럽다는 것을. 처음엔 ‘며칠 신어서 그런가?’, ‘양말이 두꺼운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합니다. 사람들은 곧잘 불편함의 진짜 이유를 외면하고 주변의 사소한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발가락이 꽉 조이는 구두를 신고도 ‘오늘따라 길이 왜 이리 험해’라며 엉뚱한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어색함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발가락 끝이 짓눌리는 듯한 불쾌감이 온 신경을 건드립니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뻐근해집니다. 그제야 툴툴거리기 시작합니다. “길이 왜 이렇게 엉망이야?”, “돌멩이가 너무 많잖아!” 우리는 종종 불편함의 책임을 바깥으로 돌립니다. 스스로의 고통을 인정하기보다는 외부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마음 한 편의 불편한 진실로부터 눈을 감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늘 발을 옥죄는 그 무엇,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발은 이미 삐걱거리고 아우성인데, 우리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붙잡혀 좀처럼 그것을 벗을 생각을 못 합니다. 꽉 조이는 끈을 느슨하게 풀거나, 발 모양에 맞춰 깔창을 바꿔볼 생각조차 못한 채, 그저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을 뿐입니다. 묘한 안정감에 기대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괜히 건드렸다가 더 불편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현재의 답답함 속에 우리를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오래된 가구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불편한 것을 알면서도 ‘오래 써서 정이 들었으니 그냥 써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익숙함은 때때로, 낡은 담요처럼 우리를 덮지만, 실은 무거운 짐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마치 이 모든 고통이 온전히 세상의 잘못인 것처럼. “세상이 날 힘들게 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라며 날마다 발을 탓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한때 자주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밤이 깊도록 이어지는 대화가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엔 말보다 침묵이 많아졌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보단 분위기를 맞추는 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 관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저 술이 이어준 인연일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종종 스쳤습니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 어색하고, 멀어진다고 해서 미안해할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 거리감이 괜히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익숙함이라는 껍데기가 주는 안락함, 그리고 새로운 고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발에 익숙해진 낡은 운동화처럼, 불편한 줄 알면서도 쉬이 놓지 못했던 거죠. 낡은 연애처럼, 권태롭고 불만스러우면서도 ‘헤어지면 더 힘들겠지’라는 생각에 갇혀 관계를 지속하는 심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의 저는, 마치 꽉 막힌 도로 위를 달리는 낡은 자동차 같았습니다. 덜컹거리고 속도도 안 났지만, 익숙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고통을 감내했던 겁니다. 그 갑갑함은, 마치 물속에 갇힌 듯 숨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발을 조이는 그 무엇이 작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용기가 필요합니다. 꽉 조이는 끈을 풀어낼 잠깐의 여유, 그리고 정말 맞지 않다면 다른 것을 찾아 신는 대담함.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내가 선택한 건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오래 신을수록 더 편해질 거야’ 라며 스스로를 속이는 겁니다. 고통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니까요. 비싼 옷을 샀는데 막상 입어보니 불편하면 왠지 모르게 ‘이 옷은 원래 이런 핏이야’라고 우기는 심리와 비슷합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불편함을 감수하며 억지로 입게 되는 거죠. 그 어리석음은, 마치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잡고 있으면서 ‘곧 식을 거야’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험난한 세상의 탓이라기보다, 지금 나의 발 상태와 맞지 않는 무언가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발에 맞지 않는 좁은 신발을 억지로 신으면, 결국 발 전체가 고통스러워 걷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족쇄를 벗어볼 수도 있었고, 좀 더 넉넉한 사이즈나 다른 디자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저 묵묵히 아픈 발을 질질 끌며, 그것 탓만 했던 겁니다. 이미 들인 시간과 노력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낡은 것을 고집하는 어리석음. 오랫동안 투자한 주식이 계속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팔면 손해니까’라며 붙잡고 있는 심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손실 회피 심리라는 덫에 걸려,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의 선택을 고집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고 소리치기 전에, 지금 내 발을 짓누르는 이 갑갑함이 정말 나에게 맞는 것인지 조용히 물어보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신어왔던, 낡고 굳어진 생각, 단단한 고정관념이라는 한 켤레의 족쇄가, 지금 이 걸음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신발을 신습니다. 남들이 멋있다고 하니 따라 신었던 유행 지난 족쇄, 한때는 발에 잘 맞았지만 지금은 늘어날 대로 늘어나 헐렁거리는 족쇄, 혹은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타협했던 싸구려 족쇄까지. 하지만 우리의 발 모양도 변하고, 걸어야 하는 인생길의 풍경도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족쇄는 결국 상처와 고통만을 남길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신발 속에 조약돌이 들어간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관계나 환경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맞지 않을 때, 마음속에는 작은 조약돌 하나가 들어간 듯 미묘한 불편함이 끊임없이 느껴집니다. 그 불편함은 무시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져 결국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멈춰야 할 시간입니다. 조용히 신발 끈을 풀고, 발끝을 바라봅니다. 오래된 낡은 습관과 신념들, 무심코 받아들인 사회적 규범과 기대의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습니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신으며 걷는 여정은 이제 끝내야 할 때입니다.


진짜 나의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잠시 멈추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그려봅니다. 낡은 족쇄를 벗어내고, 비로소 자신만의 걸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신발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당신만의 것을 신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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