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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찾아올 때, 나는 멈춰 선다

by 정성균

달빛이 유리창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밤입니다. 고층 아파트의 조용한 거실, 익숙한 가구들과 물건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머그컵, 벽면을 따라 정돈된 책들, 액자 속 작은 그림 하나까지. 늘 보던 풍경인데, 오늘따라 어딘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커튼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언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이렇게 익숙하고도 편안해졌을까요. 엘리베이터 소리도, 옆집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이 정적 속에서, 오직 나만의 숨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리는 이 순간이 어쩌면 가장 진실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고요함 속에서도 마음 한켠은 묘하게 저릿합니다. 차갑고 반듯한 벽면에 둘러싸인 이 공간 안에서,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먹먹함이 불쑥 밀려옵니다. 조용한 밤,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는 때로 불안의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낡은 마루는 없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납니다. 북적이는 모임 속에서도,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속에서도 문득 고독이 스며듭니다. 함께 있음에도 외롭고,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 이 조용한 고층 아파트의 밤은, 그 감정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마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익숙할지도 모릅니다. 친구들과 웃으며 식사를 하다가도, 문득 멈춰 “나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라고 자신에게 묻게 되는 순간들. 고독은 단지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때로는 타인의 기대 속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잊었을 때 다가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다 보니, 정작 내가 누구였는지 흐릿해진 건 아닐까요.


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 선물처럼 느껴지던 고요가 어느 순간 낯선 침묵으로 바뀔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질문이 떠오릅니다.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왜 나만 이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지?’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늦봄의 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잎이 무성해지는 나무들이 바깥 풍경을 가득 채워도, 마음 한편은 여전히 흔들립니다. 마치 겨울을 끝내고 간신히 피어난 잎사귀가 바람에 떨리는 것처럼.


SNS에 올라오는 타인의 찬란한 일상들—여행지의 햇살, 성취의 순간, 웃음으로 가득한 얼굴들—은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듭니다. 계절은 분명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 초입에서 망설이고 있는 걸까. 그럴 때면, 불안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마음 한 구석을 비춥니다. 따스한 듯 보이지만, 그 빛은 오히려 속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그곳에는 때로 그림자도 함께 서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은 계절의 바람처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감정일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시기, 우리는 낯선 것들과 마주하며 또다시 적응해 나갑니다. 중요한 건 이 감정을 밀어내려 애쓰기보다, 잠시 멈춰 그것을 찬찬히 바라보는 일입니다. 불안이 앉아 있는 자리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내가 진짜로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물어보는 시간. 지금은 늦은 봄, 곧 여름이 올 계절. 계절이 흘러가듯,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건 멈추는 것입니다. 거센 흐름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면, 불안의 실체도 조금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듯,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면,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닮았습니다. 겉보기에는 황량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 샘을 찾기 위해선 고요한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결국 나를 마주하는 길로 이어집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흐트러짐 없이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볼 기회를 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피하고 싶어 하는지 천천히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아프기도 합니다. 잊고 싶었던 상처나, 드러내기 꺼렸던 감정과 마주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집니다. 그 안에서 진짜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불안을 잠재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작고 단순한 실천입니다. 큰 계획보다,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들. 아침 공기를 마시며 창문을 여는 일, 책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순간을 적는 일. 이런 작고 사소한 일들이 모여 어느새 커다란 안정감을 만들어냅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날에도, 이런 작은 움직임은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이끕니다.


지금 이 순간의 걸음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자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기보다, 나만의 리듬으로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각기 다른 박자를 가진 악기로 이루어지듯, 삶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의 균형이 맞춰지고, 불안도 조용히 자리를 내어줍니다.


삶은 때로 우리를 어두운 터널 속에 데려다 놓습니다. 누구의 목소리도 닿지 않는 것 같고, 혼자인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미약하게 빛나는 별빛은 존재합니다. 그 작은 빛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진정한 나의 목소리,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의 방향이 그곳에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알아가는 가장 깊은 대화의 시간입니다. 불안이라는 손님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이해봅시다. 그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더 깊은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의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 마음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당신만의 샘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고요하고 맑은,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가 흐르는 그 샘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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