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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말이 없다

조용한 사람의 말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by 정성균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세상이 시끄럽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혼자만의 호흡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말이 적고, 움직임이 느리고, 설명보다는 침묵이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의 곁에선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기류가 있다. 조용한 공기, 단정한 리듬,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어떤 깊이. 큰소리는커녕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지만, 마음은 서서히 정돈된다. 마치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그 사람 곁에서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그의 말은 많지 않다. 대신, 눈이 먼저 움직인다. 상대의 표정, 눈빛, 말의 맥락에 담기지 않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 그의 관찰은 조용하지만 날카롭다. 흘러가는 말 대신 잠시 머무는 시선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쏟아지는 정보, 요란한 알림음, 쉼 없이 반응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도 그는 마치 수면 아래 고요히 가라앉은 돌처럼 중심을 잃지 않는다. 어지러운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설명보다 강한 울림을 준다. 말보다 느린, 그러나 더 깊은 리듬으로 세상을 읽는다.


아주 가끔, 꼭 필요한 순간에만 꺼내는 말이 있다. 긴 설명 없이 던져지는 짧은 한마디. 그 말은 단단하다. 돌처럼 굳지 않지만, 손에 쥐어진 조약돌처럼 부드럽고 묵직하다. 오래도록 남아, 그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말은 말의 모양보다 태도와 시간으로 남는다.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누구보다 앞서기 위해 애쓰지도 않고, 늦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삶은 경쟁이 아니라 흐름이다. 방향을 잃지 않는 것, 그게 그의 방식이다. 강물이 그렇듯, 천천히 흘러도 결국 바다에 이르듯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가 있는 자리는 다르다. 한 사무실, 같은 시간 속에서도 요란한 기계음과 들뜬 대화 사이에서 그는 자기 호흡을 지킨다. 말이 없어도, 존재는 남는다. 오히려 말없이 머문 시간이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손끝의 움직임, 머뭇거림 없는 응시, 불필요한 설명 없이 완성된 결과들. 그 모든 것이 조용한 언어가 된다.


무언가를 준비할 때도 그는 특별한 제스처 없이 움직인다. 꾸밈없는 일상적 동작, 오래된 습관처럼 몸에 밴 흐름 속에서 하나씩 쌓아 올린다. 표면적으로는 느리게 보이지만, 그 안엔 눈에 보이지 않는 축적이 있다.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말없이,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다음 단계를 준비해 간다. 결과는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이 된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들뜨거나 요동치지 않을 뿐이다.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 의외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모두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감정을 안으로 정리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자기 리듬으로 돌아간다.


어쩌다 보이는 미소는 잊히지 않는다. 예고 없이 지어지는 그 미소는 말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햇살처럼 따뜻하고, 물안개처럼 가볍다. 그 미소가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 설명 없이도, 그가 살아온 시간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심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 "왜 그렇게 조용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미소 하나로 충분한 답을 대신한다. 그 안엔 질문보다 깊은 이해와, 말보다 깊은 삶이 담겨 있다. 그를 통해 배우는 것들은 대개 설명이 아니라 관찰로 이루어진다. 말 한마디보다, 그 사람의 방식 자체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그는 빠르게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익숙한 것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며 몸에 익힌다. 지식을 쌓기보다 삶에 녹여내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늘 실천에 가닿아 있다. 이론보다 태도, 말보다 행위로 드러나는 진정성.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작은 소리, 낯익은 풍경, 스쳐 지나는 표정. 그 안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특별한 순간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기쁨을 수집한다. 삶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임을, 그는 조용히 보여준다.


그의 걸음은 크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조용한 자취가 남는다. 완성된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매일을 조금씩 덜어내고, 정리하고, 다시 나아간다. 멈추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돌아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 느린 걸음이 진짜 방향을 만들어낸다.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 고요한 틈에서 내면을 정리하고, 다음 걸음을 준비한다. 말로 설득하지 않아도, 그의 태도는 조용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함께 있어도 침묵이 전하는 위로가 있다. 그 곁에 서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처럼.


그는 어디에도 빨리 도착하려 하지 않는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결국 제 길로 들어선다.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그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보며 배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고, 보이지 않아도 남는 진심이 있다는 것을.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는 부드러운 인내, 따뜻한 배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담겨 있다. 말보다 삶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때가 있다. 세상의 속도가 감당되지 않을 때, 그런 존재는 소리 없이 곁에서 속삭인다.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그 조용한 걸음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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