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말이 없는 사이가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오후의 풍경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길 건너 은행나무의 초록 잎사귀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라도 불면, 나뭇가지들은 마치 손을 흔들 듯 가볍게 흔들렸다.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나는 묘한 고요를 느꼈다. 평화롭지만, 어딘가 잔잔한 파동이 일렁이는 그런 고요.
어제저녁 그와의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서로의 침묵이 더 길었던 순간이었다. 마주 앉아 있었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섬에 고립된 듯했다. 그가 들고 있던 책장 넘기는 소리, 내 손 안에서 컵과 쟁반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침묵은 때때로 편안함을 주지만, 어제의 침묵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웃음이 터지고, 별것 아닌 농담에도 한참을 깔깔거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마치 낡은 재즈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각자의 선율은 달랐지만, 합쳐졌을 때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늘 완벽했다.
시간이 흐르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말이 줄어드는 걸까.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걸까. 말없이 건네는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이 통한다고 믿어버리는 순간들이 쌓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깊은 유대감이라 여겼다. 서로의 속마음을 굳이 꺼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하지만 그 안도감은 서서히 균열을 만들었다. 침묵이 쌓이고 쌓여, 투명한 벽이 우리 사이에 세워지는 것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날 저녁이 선명하다. 그가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모습. 그의 눈길은 내게 머물지 않았고, 내 눈길 역시 그의 시선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각자의 생각 속으로 침잠해 있었다. 텅 빈 대화의 공간. 창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작은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조차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나는 여러 번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어색한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까 봐. 그런 망설임이 입을 닫게 했다. 그렇게 닫힌 입은 마음까지 닫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고, 우리 사이의 간극은 조금씩 더 벌어지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거리가 생겨난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아주 작은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괜찮아?"라는 짧은 물음.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는 무심한 듯 따뜻한 질문. 그런 말들 속에는 따뜻한 숨결이 깃들어 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장 같은 마음도, 그런 작은 온기 앞에서 조금씩 녹아내릴 수 있을 텐데. 먼저 손 내밀고 침묵을 깨는 사람이 늘 용기를 낸 사람일 것이다. 그 조용한 틈새를 메우는 건, 다름 아닌 한마디 말일지도 모른다. 멀어진 거리를 다가서게 하는 건, 오래된 안부 같은 것일지도.
그날의 침묵이 깃든 공기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그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단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내 마음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한마디는 어떤 형태였을까. 미처 전하지 못한 안부였을까, 아니면 설명되지 않은 작은 마음이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고 싶다. 다시 그와 마주 앉아, 단 한마디라도 괜찮다고 묻는 그 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오는 어느 날의 햇살은, 우리 사이의 침묵마저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을까.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