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 같은 방, 다른 마음
온종일 같은 공간에 머물렀지만, 마음은 어쩐지 닿지 않았다. 말수가 줄었던 것도,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제 생각에 잠기다 보니, 함께 있으면서도 어딘가 따로인 느낌이 흘렀다. 해가 뜨고 지는 사이,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빛을 받았건만, 마음은 다른 방향을 걷고 있었다.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보글보글, 잠시 공간을 채우는 그 소리 뒤로, 방 안에서는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가끔 시선이 스치기도 했지만, 눈은 곧 흩어졌고, 어색한 미소가 지나간 뒤엔 다시 고요함만이 남았다.
“밥 먹을까?”
“응.”
“이거 어때?”
“괜찮네.”
필요한 말만 오갔다. 감정의 흐름은 그 짧은 대화 이상으로 깊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있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까지 연결된 느낌은 없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눈치만 오갔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기다리는 기색도 느껴졌다. 그 애매한 공기 속에서, 시간은 말없이 흘렀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날이었다. 시작은 아주 작고 조용한 침묵이었다. 불편함도, 다툼도 아닌, 익숙함에 덮인 무심함이 차츰 거리를 만들었다. 처음엔 그저 편하다고 여겼다.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게 편안함이고 가까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침묵은 점점 무게를 더했다.
“지금 말 걸어도 될까?”
“괜히 방해가 될까?”
그렇게 망설이다, 결국엔 ‘다음에 하자’로 마음을 접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며, 아주 느리게, 눈에 띄지 않게, 마음의 문이 닫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서로 다른 화면을 바라보며 같은 소파에 앉는 일이 익숙해졌다. 나는 휴대폰에, 옆에 앉은 모습은 태블릿에 집중했다. 같은 음악이 흘러도 나는 가사에 젖었고, 그는 배경음처럼 흘려들었다. 창밖 풍경을 보며 나는 잠시 멈춰 있었고, 옆에서는 날씨를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 스쳐갔다. 물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마음은 각자의 세계 속에 머물고 있었다. 감정도 그만큼 나란히 서 있지는 않았다.
그런 날이면 괜히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싶어진다.
“오늘 하루 어땠어?”
그 흔한 인사 한마디가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졌는지 모르겠다. 돌아올 대답이 짧거나, 피곤하다는 말만 남을까 봐 머뭇거린다.
“그냥 그랬어.”
“별일 없었어.”
그 한마디 뒤에 따라올 정적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지나쳤다. 마치 투명한 벽이 우리 사이에 생긴 것처럼, 마음이 닿지 않는 느낌이 선명했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은 금세 알아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온도가 다르면 그 차이는 쉽게 느껴진다. 따뜻함이 필요한 순간에 찬 기운만 감돌 때, 그 간격은 생각보다 더 멀게 다가온다.
그날 저녁, 문득 올려다본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매일 보는 익숙한 얼굴인데, 그 순간만큼은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나만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나만 이 거리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같은 방 안에서 서로 다른 마음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뜻밖의 쓸쓸함을 불러왔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방 안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내 마음만 소란스러웠다.
아무 일 없던 하루 끝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너무 오래 같은 사람으로만 봐왔던 건 아닐까. 처음의 설렘, 함께한 시간, 그 많은 기억들이 너무 선명해서, 그 안에 머무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마음도, 관계도 조금씩 변하는데, 그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고 익숙함이라는 틀에 가두려 한 건 내 쪽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가까워지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건 아니다. 긴 대화도, 멀리 떠나는 시간도 없어도 된다.
“오늘 어땠어?”
이 짧은 인사 하나가 충분할 때도 있다. 그 한마디가 서로를 향한 관심이라는 걸, 아주 작은 신호라는 걸 우리는 안다. 시선을 맞추는 몇 초, 말없이 내미는 손 하나,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닫힌 마음을 천천히 열어줄 수 있다.
같은 방에 있다고 마음까지 함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더 자주, 더 조심스럽게, 작은 진심을 건네야 한다. 아무 말 없이 스치는 하루 속에서도, 그 마음 하나가 서로를 향한 다리가 될 수 있으니까. 조용한 밤이면 더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 침묵이 편안함이 되려면, 그 안에 무관심이 아닌 이해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아주 조용히, 다시 같은 온도를 나누는 연습을 한다.
지금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나란히 앉아 늦은 밤 드라마를 보던 날이었다. 화면보다 서로의 표정에 더 집중했고, 말은 없었지만 웃음이 동시에 흘렀다. 그런 순간이 분명 우리 사이에 있었다. 마음이 다가갔다고 느꼈던 그 시간.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침묵이 더 선명해진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예전의 그 따뜻한 조각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움만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낡은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대화로, 오늘의 시선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시작 아닐까.
밤이 깊어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깨어 있었다. 작은 말 한마디라도 건넬까 망설이며 눈을 떴다 감았다. 옆에 앉은 모습이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가도,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다행처럼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 밤,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한 번 더 두드려 보기로 했다.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