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 대답 없는 안부가 오래 남는다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얼굴들과 스쳐 지나가고, 또 그렇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아무런 특별한 이유나 명분 없이, 문득 잊고 지내던 누군가가 마음 한켠에 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빛바랜 사진처럼, 그 존재는 예고 없이 찾아와 내면을 흔든다.
그날도 그랬다. 복잡다단한 일상의 한복판에서, 홀연히 한 이름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어제 본 듯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딱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묘하게 건드렸다. 그저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 여겼던 사람에게서, 아련하고도 섬세한 그리움 같은 것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조차 희미한데,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지금쯤 그는 어디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까. 길고 복잡한 생각들은 애써 접어두고, 그저 짧은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잘 지내?' 단 세 글자. 간결하다 못해 무뚝뚝하기까지 한 인사였지만,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내 마음은 미세한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 짧은 문장 안에는 혹여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까 하는 조심스러움과, 동시에 혹시나 하는 기대조차 품지 않으려는 나 자신과의 조용한 약속이 얇게 포개져 있었다. 그 세 글자는 단순한 안부 그 이상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없었다. 조용한 읽음 표시 하나. 그게 전부였다. 시간은 흘렀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알림이 울릴 때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고,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뒤엔 다시 화면을 껐다. 괜찮다고, 기대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봤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어수선했다. 괜히 보냈나, 시기가 안 좋았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짧은 안부는 더 길게 마음에 남았다.
안부라는 말은 참 묘하다. 누구나 쉽게 꺼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이에게 건네는 인사 속에는 깊은 마음들이 숨어 있다. 보고 싶은 마음, 미안함,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조용한 표현까지. 말이 짧을수록 더 많은 감정이 응축되는 법이다. 어쩌면 연락을 시작할 핑계가 필요해서 꺼낸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대답이 없을수록 그 말은 오래 남는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한 줄의 문장이 마음 어딘가를 계속 두드린다. 겉으론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조금쯤 기대하고 있었던 마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안부에 답하지 못했던 날들. "잘 지내?"라는 말이 도착했을 땐, 사실 전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그 속내를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다. 괜히 말이 길어질까 두렵기도 했고, 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누군가와 감정을 주고받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이 너무 깊숙이 들어왔기에 더 망설여졌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법을 잊었을 때, 말은 더 어렵다. 손끝에서 몇 번이고 맴돌다 끝내 보내지 못한 말들. 그런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기에, 답이 없는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점점 더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고, 속마음을 감추는 데 능숙해진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혹은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인지 짧은 안부 하나 건네는 일조차 조심스럽다. 혹시 상대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 짧은 말 한 줄조차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은 보내는 사람에겐 가벼울지 몰라도, 받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르게 닿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안부를 건넨다. 길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한 줄이면 충분하다. 혹시 내 안부가 도착하긴 했을까, 바쁜 하루 중 잠시나마 마음이 움직였을까. 아무 대답이 없더라도, 언젠가 문득, 내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를 바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만으로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고 믿고 싶다.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남는 감정이 있다. 끝나지 않은 인연처럼, 마침표 없는 문장처럼. 대답 없는 안부는 그냥 흘러가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게 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을 조용히 마음속에서 한 번 불러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안부일 수 있다. 서로 닿지 않아도,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여전히 마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