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10편 -서운함은 말하지 않으면 자란다

by 정성균

처음엔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여겼다. 주말 오후, 오랜만에 함께 나선 공원 산책길에서 아침에 본 시사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머물지 못하고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아, 그랬군.” 짧은 대답이 돌아왔고, 손에 들린 스마트폰 알림이 연신 신경을 건드렸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듯했다. 애써 태연한 척 걸었지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누구에게나 잠시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가 있듯,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주 잠깐 스친 서운함, 굳이 붙잡아 둘 이유도, 목소리를 높일 까닭도 없다고 애써 넘겼다. 공원에 스미는 바람이 그 미미한 감정쯤은 금세 휘저어 날려줄 것만 같았다. 예전 같으면 공연히 토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나도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그림자처럼 자꾸만 따라다녔다. 사무실 커피 머신 앞에서 머그잔을 헹굴 때도, 불쑥 그 순간이 혼잣말처럼 되살아났다. 마치 반짝이는 새 구두 속에 숨어든 작은 모래알처럼, 애써 무시하려 해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김없이 발끝을 파고들었다. ‘어째서 그는 그토록 무심했을까?’ 하는 물음이 종일 머릿속을 떠돌다, 문득문득 혼잣말로 새어 나왔다. ‘내가 괜한 기대를 품었던 걸까?’ 싶다가도,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짙은 아쉬움이 뒤따랐다. 그렇게 사소하다 치부했던 감정은,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과 함께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이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양 흘려보내기엔,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무게가 남았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야 깨달았다. 부산했던 내 마음에도 잠시, 쉼표가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침묵이 언제나 최선의 미덕은 아니라는 사실도. 예전엔 그가 조금만 무표정해도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하며 팔을 잡아끌곤 했다. 때로는 그가 먼저 내 얼굴빛을 읽어내고 “오늘 좀 힘들어 보이는데. 우리 잠깐 숨 돌리고 갈까?” 하며 다정히 물어주었다. 왁자한 시장통에서도, 호젓한 찻집 구석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한 뼘씩 다가서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흐름 속에 서서히 미세한 어긋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괜히 먼저 물었다가 무심한 반응에 마음이 쓸릴까 저어하게 되었고, 그의 지친 안색에 내 속상함까지 얹는 것이 차마 미안하고 버거워, 나는 점점 더 입을 다물었다. ‘괜스레 긁어 부스럼 만들 건 없겠지.’ 그런 말들이 목구멍에서 몇 번이고 맴돌다 끝내 삼켜졌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 안전한 듯 위태로운 침묵의 그늘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그 침묵이 실은 우리 관계를 보이지 않게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전에는 사소한 다툼 끝에도 서로 어깨를 기대며 금세 풀어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간단한 한마디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믿으며 미뤄둔 순간들이 어느덧 두터운 벽처럼 쌓여갔다. 말없이 지켜보는 배려가 서로를 위하는 최선이라 믿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서로의 진심을 외면하는 그럴듯한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함께하는 시간의 모양새는 여전했다. 주말이면 경조사를 챙겼고, 가끔은 영화도 보고 한적한 길로 드라이브도 다녔다. 하지만 대화는 늘 표피만을 맴돌 뿐이었다.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도 각자의 상념 속에 잠겨 있었고, 미묘하게 엇갈리는 감정의 결이 조용히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친구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그랬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웃음 섞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홀로 말없이 잔만 기울였다. 예전에는 그의 유머 한 자락이 얼어붙은 분위기도 스르르 녹이곤 했는데, 그날 그의 침묵은 외딴섬처럼 고립돼 보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도 그의 정적은 유난히 도드라져, 내 마음에 서늘한 고독감을 새겨 넣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속 빈자리로는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며칠 뒤, 늘 가던 동네 찻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단단히 마음먹고,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건강검진 결과가 영 신경 쓰이더라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무는 듯했다. 아주 짧은 희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지만, 그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무심히 말했다. “다 그런 거지 뭐, 나이 들면 다들 그래.” 그 한마디가 차가운 추처럼 마음속 깊이 가라앉았다. 사실 대단한 위로나 현명한 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어디가 어떻게 걱정되는 건데?" 혹은 "그래서 요즘 좀 힘들어 보였구나" 하는 따뜻한 관심 한 줄기면 충분했을 텐데. 한때 내 작은 미열에도 밤새도록 곁을 지켜주던 그 사람이었기에, 오늘의 무심함은 유난히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의 반응은 내 힘겨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고, 그 앞에서 더는 속마음을 꺼내 보일 용기마저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날의 대화가 무겁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운함은 이미 차가운 돌덩이가 되어 가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은 후였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작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 사이를 조금씩 소리 없이 벌려왔는지도 모른다. 침묵으로 다져진 거리감은, 어쩌면 격렬한 다툼보다 더 깊고 오래도록 남는 상처였다.


사실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굳이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하는 안일한 기대와 ‘뾰족한 수가 있겠어’ 하는 무기력한 체념이, 결국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 올렸다는 것을. 침묵이 가장 손쉬운 선택처럼 여겨질 때마다 주저 없이 입을 다물었고, 진짜 하고 싶었던 속마음은 늘 다음으로 미뤘다. 어쩌면 평온해 보였던 그 시간들이, 실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외면해 온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해 질 녘 공원 벤치에 다정히 앉은 노부부를 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노을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어깨를 기댄 채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도 깊은 평화가 오래도록 가슴에 아련한 여운을 남겼다. 아마 저분들도 그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말을 나누고, 때로는 부딪히고,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저 평온을 다듬어왔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그 당연하고도 소중한 과정을 놓쳐버린 걸까.


한때는 서로의 무던함을 깊은 이해의 증표라 여겼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것이야말로 무관심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깨달음. 돌아보면 그가 건네던 작은 배려들을 얼마나 무심히 지나쳤던가. 그가 말없이 내밀던 따뜻한 차 한 잔, 피곤이 역력한 날에도 잊지 않고 챙겨주던 소소한 선물, 그리고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그의 깊고 그윽한 눈빛까지. 그 모든 것이 그만의 방식으로 내게 속삭이던 애정이었음을. 어쩌면 그의 침묵조차, 내게 더는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그만의 힘겨운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이르자, 마음 한구석이 다시금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내가 먼저 달라져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언젠가 맛있다고 했던 한정식집을 기억해 내 예약하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조용한 창가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마주 앉은 그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 여기 음식, 참 괜찮다고 했었잖아요."


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그걸 다 기억했어?... 정말 고마워."


그 작은 미소 하나가, 오랫동안 가물어 메말랐던 내 마음에 단비처럼 촉촉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심스럽지만, 꾸준히 그의 마음에 다가서기로 했다.


그가 유난히 피곤해 보일 땐 "오늘 하루, 정말 고생 많았죠?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숨 돌려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처음엔 서로 멋쩍은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도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나는 섣부른 조언이나 판단 대신, 그저 그의 말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그의 짧은 한숨 속에 숨겨진 삶의 무게를 가만히 헤아리려 애썼다. 오래도록 삐걱거리던 낡은 문에 정성스레 기름칠을 하듯, 그런 작은 관심과 배려들이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틈을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메워가기 시작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예전으로 완벽히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은, 여전히 익숙한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포기하지 않고 내미는 이 진심 어린 손길의 온기를, 언젠가 그는 온전히 알아주고 받아줄 것이라 믿는다.


관계란 어쩌면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가꾸는 정원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매일같이 따스한 햇살을 살피고 알맞게 물을 주며, 시도 때도 없이 자라나는 잡초들을 묵묵히 뽑아내야 비로소 그 푸르름을 변치 않고 지켜낼 수 있는. 서운함이라는 잡초는 소리 없이 자라 하룻밤 사이에도 마음밭을 뒤덮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걷어내고 다시 따뜻한 온기를 채워 넣는 일에는 생각보다 더 큰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다.


"오늘 안색이 참 좋아 보여요." "이 차, 향이 유난히 깊고 좋죠?" 그런 소박하지만 진심 담긴 말 한마디가 메마른 관계에 다시금 숨결을 불어넣고, 무심했던 어깨 위에 살며시 얹는 다정한 손길 하나가 어느새 시들어가던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준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금, 차마 말하지 못한 서운함을 가슴 한편에 소중한 비밀처럼 묻어두고 있진 않은가. '이쯤은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어쩌면 그런 아니한 믿음이야말로 관계 속에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균열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이 무관심으로 쌓이면, 마음의 거리는 소리 없이 멀어지는 법이니까.


오늘 저녁, 늦은 봄 공원의 조용한 골목길을 나란히 걷다 그의 팔에 살며시 내 팔을 끼워 넣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많이 힘들지는 않았고?" 나지막이 물어오는 내 목소리에,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고, 나지막하지만 따뜻한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밤공기 속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작은 관심이 만들어낸 이 소소한 기적이, 오늘도 우리 사이를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적셔간다. 이 온기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오늘도 그렇게 관계라는 소중한 학교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다. 아주 작은 진심 하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놀라운 변화의 힘을, 나는 온 마음으로 믿어보려 한다.


그래서일까. 문득 가슴에 와닿는 글귀 하나가 있다.

積小成大(적소성대).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서운함도 그러하겠지만, 살뜰한 배려와 작은 관심 또한 그러하리라. 우리가 매일 서로에게 건네는 이 작은 손길들이, 시간 속에서 더욱 깊고 단단한 믿음으로 자라나기를.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용히, 함께 걸음을 옮긴다.

이 글은 나와 오래 함께해 온 누군가와의 어느 계절을 돌아보며 쓴 작은 기록이다.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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