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
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내 몸의 일부처럼 익숙했다. 작은 화면 위로 그의 이름 석 자가 떠오르면, 가슴이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두근거렸다. 우리는 하루를 촘촘히 엮어 서로에게 건넸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하늘에 별이 박힐 때까지, 소소한 일상부터 마음 깊숙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갔다. 길을 걷다 마주친 풍경을 사진으로 보내면 웃음 어린 답장이 도착했고, 그 한 줄이 또 다른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 말을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렀다. 쌓여가는 시간이 서로의 하루가 되었고, 아침 인사로 시작한 날은 밤늦게 이름을 부르며 닫혔다. 깊은 밤 전화기 너머로 흐르던 목소리에는 농담도 있었고, 한숨 섞인 고민도 담겨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조용히 받아주며 함께 머물렀다.
어느 순간부터 간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각자의 삶이 바빴다고 여겼다. 주말쯤에는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웃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은 멀어졌다. 며칠의 공백이 한 달이 되었고, 계절은 다른 풍경을 만들었다. 특별히 다툰 일도, 상처를 주고받은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날들이 쌓였고, 만들어진 빈자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믿음도 옅어졌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멀어지기도 한다. 한때 가까웠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오가던 온기도 가라앉았다.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예전엔 작은 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소소함조차 흘러가지 않는다. 연락처 목록을 넘기다 그의 이름을 보면 손끝이 멈춘다. 오래된 장면들이 떠오르고,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이렇게 조용히 흘러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별의 말조차 남기지 못한 채 멀어지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휴대폰 화면에 이름을 띄워놓고 보내지 못한 메시지 앞에서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마음속에 품은 채 하루를 지나간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휴대폰 속에 있다. 스치듯 발견할 때마다 손끝이 멈춘다. 메시지 창을 열어 마지막 대화를 읽다 닫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잘 지내?’ 한마디를 보내볼까 생각하다가도 망설임이 밀려온다. 갑작스럽게 연락하는 건 아닐까, 어색해할까, 불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계속 이어지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화면을 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그도 나처럼 메시지 창을 켰다 지웠다 했을까. 라디오에서 우리가 듣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내 생각을 한 적 있었을까. 그의 시간 어딘가에 내 흔적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 잠시 머문다.
그 역시 고민의 밤을 보냈을까. 메시지를 쓰다 지운 밤이 있었을까. 아니면 나는 그의 일상에서 점점 희미해졌을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하루 속에서 나는 없는 이름이 되어버린 걸까. 확인할 수 없는 생각들이 마음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어느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잘 지내고 있을까.’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나눴던 인사가 이렇게 어렵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시간이 멀게 느껴진다.
볕 좋은 오후,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감싼 손끝에 온기가 남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가 귀를 스친다. 그 노래가 시작되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향한다. 눈을 감으면 장면들이 이어진다.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마신 가락국수 국물, 겨울밤 공기 속에 퍼지던 하얀 입김, 소박한 가게 안에서 터진 웃음소리, 영화 속 대사를 흉내 내며 걸었던 거리, 비를 피해 작은 우산 아래 어깨를 나란히 했던 골목길. 모든 장면이 선명하다. 그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또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 걸까. 아니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서로의 안부를 기다리고 있을까.
함께 보낸 시간은 대화 그 이상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어주던 사람.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너그러움. 그래서였는지, 하루가 특별하지 않아도 그의 곁에서는 모든 시간이 특별했다.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된다. 그의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했는지. 작은 표정만으로 기분을 읽어내던 눈빛, 아무 말 없이 등을 두드려주던 온기. 그런 위로가 사라진 뒤,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진다.
관계는 때론 섬세하게 멀어진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지 망설이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도 거리는 조금씩 벌어진다. 짧은 침묵이 길어져 어색함이 되고, 이어지던 대화는 줄어든다. 나눴던 이야기들은 기억 속 어딘가에 남는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어딘가 서랍 속에 담긴 채 때때로 떠오른다. 지금의 침묵은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두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말이 그 기억에 흠을 남길까 조심스럽다.
문득 그런 생각이 지난다.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짧은 안부라도 건넸더라면 흐름은 계속 이어졌을까. 하지만 말들은 늘 마지막 순간에 멈춰 섰다. 부담을 주진 않을까, 이미 잘 지내는 그에게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상처받지 않으려 한 걸까. 그리고 지금은 그 조심스러움조차 배려였다고 믿고 싶어진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를 잊으려 한 적은 없다. 그 시절의 모습으로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고, 그래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기억은 그렇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조심스러움은 침묵으로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며 그 침묵을 깨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가끔 이 조용한 침묵 속에도 전하지 못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어느덧 시간은 흘렀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던 인사조차 시작하기 어려워졌다. ‘이젠 늦은 걸까’ 하는 생각이 가만히 마음에 내려앉는다. 떠난 것도, 끝낸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와 있다. 모든 관계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와의 기억은 따뜻한 자리에 조용히 접어둔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조용히 아려온다. 멀어진 사람들, 건네지 못한 안부들, 여전히 선명한 기억들. 달력 속 그의 생일을 보거나, 비 오는 골목길을 걷거나, 영화 장면 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그날들이 살아난다.
언젠가 다시 연락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예전처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 앞에서 또 머뭇거리다 메시지 창을 닫는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그의 안부를 향해 조용히 머문다. 짧은 안부가 모든 걸 바꾸진 않겠지만, 언젠가 그 온기가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기를 바란다. 그날이 오면 망설이지 않고 안부를 전할 수 있기를. 오래 담아둔 마음을 조용히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길 위에서 마주친다면. 긴 설명도, 변명도 없이, 눈을 맞추고 인사할 수 있기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 그 순간, 건너온 시간의 강 너머에서 다시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럴 때면 문득 이 한 구절이 마음속에 떠오르곤 한다.
"Absence sharpens love, presence strengthens it."
— Thomas Fuller, Gnomologia (1732)
"부재는 사랑을 날카롭게 하고, 존재는 사랑을 단단히 한다."
— 토머스 풀러, 《그노몰로지아》(1732)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