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 감정이 머뭇거리는 이유
연인이나 가까운 이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함이나 긴장, 혹은 뭐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스며들 때가 있다. 늘 평온하던 익숙한 풍경에 슬며시 끼어든 작은 이질감. 그것은 마치 잔잔한 호수 표면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나뭇잎 하나가 일으키는 아주 미세한 파문처럼, 소리도 없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린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그 조심스러운 흔들림. 그런 기척, 그 미미한 떨림을 처음으로 감지했던 건 과연 언제였을까.
매일같이 반복되던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그 조용한 변화의 실마리가, 어쩌면 이미 그 무렵부터 우리 사이에 소리 없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공기의 흐름 정도로만 여겼다. 늘 듣던 익숙한 멜로디 중간에 불쑥 끼어든 쉼표처럼 잠깐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머뭇거림이 결코 불편한 침묵만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다음 악장이 더 깊고 풍성하게 울려 퍼지도록 잠시 숨을 고르는, 섬세하면서도 꼭 필요한 준비 과정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랜 시간 무대에 함께 오른 두 연주자가 눈빛으로 서로의 호흡을 맞춰가듯, 상대를 향한 고요한 기다림,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이 머뭇거림이 온전히 편안함으로만 다가왔던 건 아니다. 관계의 어느 한구석, 마음만 앞섰던 젊은 날에는 그의 침묵이 때로 오해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내 속마음을 전부 꺼내 보인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지는 그의 생각의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분명 있었다. ‘혹시 내 이야기가 따분한 걸까?’, ‘아니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하는 자잘한 불안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강물이 바위를 만나면 잠시 머무는 듯하다가도 이내 더 깊고 넓은 물길을 터서 흘러가듯, 우리의 관계 역시 그런 시간들을 겪으며 서로의 속도와 무게, 그 다름이 가진 가치를 이해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그 머뭇거림은 단순한 지체나 망설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향해 가장 안전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려는 신중한 발걸음이었음을, 우리는 차츰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머뭇거림의 의미를 섣불리 단정하기보다,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하려 애썼다. ‘요즘 서로 많이 바쁜 탓일까, 어쩌면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더 깊이 속내를 나눌 순간을 기다리는 걸지도 몰라.’ 그런 식으로 서로의 시간과 마음의 속도를 존중하며 조급해하지 않고, 잔잔한 기다림 속에서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곤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여백들이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온전히 감싸 안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 숨 쉴 틈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꼭 책으로 가득 찬 책장보다 적당한 빈칸이 있는 책장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빈칸은 무관심에서 비롯된 공백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조용히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마련된 배려의 여지, 그 자체였던 셈이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늦은 저녁, 섬세한 향을 피워 올리는 찻잔의 온기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나란히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밤의 장막이 소리 없이 내려앉자, 갓 그친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나른하게 부서지며 반짝였다. 이윽고 미세한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가 열린 창문 틈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와, 방 안은 감미로운 정적으로 천천히 물들어 갔다. 모든 감각이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또렷하게 깨어나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낮 동안 겪었던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골목길 모퉁이에 새로 문을 연 빵집 이야기, 그곳 바게트를 처음 베어 물었을 때 느꼈던 경쾌한 바삭함과 뒤이어 퍼지는 촉촉한 속살의 황홀경 같은 것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은 강아지의 유난히 깊고 맑아 보이던 눈망울. 그리고 문득,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음 한구석에서 살며시 피어오른 빛바랜 유년 시절의 아련한 기억 한 조각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고, 우리의 대화는 찻잔에서 번져 나오는 그윽한 향기처럼 공간 속에 나른하게,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의 손가락은 조용히 찻잔을 감싸 쥐고 있었는데, 그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이는 손끝의 움직임 속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다정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 표정에는 단순히 이야기를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만히 되새기는 듯한 여유와 집중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어둠 속 호수에 비친 별빛처럼 잔잔하면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듯했다. 마치 내 이야기가 그의 마음에 어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천천히 스며드는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숨죽여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내 이야기가 그의 마음에 어떤 물결을 남겼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결코 무관심의 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조용한 준비 과정, 존중의 또 다른 이름처럼 다가왔다. 마치 지혜로운 농부가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씨앗을 심듯, 서두르지 않는 조심스러운 사랑의 한 방식이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심은 종종 길을 잃고, 즉각적인 반응만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어쩌면 우리의 머뭇거림은 서로의 마음에 가장 정확히 닿을 수 있는 정직한 통로, 진심을 건네는 다리가 되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그는 내 말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세심히 듣고 있었다. 마치 아주 소중한 비밀 이야기를 처음 듣는 아이처럼, 혹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위대한 연주의 첫 소절을 대하듯 온 감각을 집중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의 리듬과 무게를 조율하며 하나의 화음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의 짧은 침묵은 다음 악장을 준비하는 연주자의 섬세한 숨 고르기 같았고, 때로는 캔버스 앞에 선 화가가 다음 붓질을 구상하는 그 고요한 순간처럼 신중하게 느껴졌다. 가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밤늦도록 이어지는 우리의 대화 속에서, 그의 머뭇거림은 성급한 결론 대신 깊은 지혜를 길어 올리는 조용한 우물과도 같았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대화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세심한 배려와 묵직한 존중을 발견하곤 했다. 어린 시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평범한 일상 곳곳에 숨겨진 진심을 찾아내는 그 조용한 기쁨, 그것이 우리 관계를 살찌우는 자양분이었다. 한 번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서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던 날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 선 말들이 오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짧지만 무겁게 느껴졌던 침묵의 시간. 바로 그 정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달아올랐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의 입장을 헤아려볼 작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건넨, ‘내가 생각이 짧았어’라는 낮은 한마디는 그 어떤 긴 변명보다도 우리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런 순간들이 우리 사이에서 마치 은은한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이어져갔다. 좋은 찻잎으로 오랜 시간 정성껏 우려낸 차처럼, 그윽한 향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며 조용히 감돌았다.
서로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듣는 모습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을 경건한 마음으로 아껴 마시는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조금 느린 대답 속에 오히려 더 깊고 진한 마음이 담겨 있을 때가 많았고, 급하게 쏟아낸 수많은 말보다 천천히 정제된 한마디가 훨씬 더 큰 울림, 더 선명한 파장을 남겼다. 때로는 말 대신 따뜻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 하나로 더 많은 것을 건네기도 했다. 그 속에는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어. 굳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언어 이상의 다정한 위로가 스며 있었다. 늦은 밤,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온기 없는 서로의 발을 슬며시 맞대고 있을 때, 우리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의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는 그의 한숨 소리, 혹은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채널을 말없이 틀어주는 그의 작은 배려 속에서, 말보다 더 깊은 위로와 이해가 강물처럼 잔잔히 흐르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었다.
말이 겹칠 때면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발언의 길을 내주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편안함, 보이지 않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조심스러운 고고학자가 아주 섬세한 손길로 유물을 다루듯,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소중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감정의 흐름은 언제나 더디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멈추지 않고 단단하게 이어져갔다. 마치 느릿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큰 강물처럼, 그렇게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관계 속에도 이렇듯 소중한 머뭇거림의 순간들이,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서로를 향한 깊은 배려와 변치 않는 존중의 표시들 말이다.
그런 기다림 속의 여백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한층 성숙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 공간은 외부의 어떤 소란으로부터도 완벽히 보호받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정원과도 같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소중한 시간들을 조용히, 그러나 충만하게 쌓아갔다. 봄날, 함께 걷던 벚꽃길에서 흩날리는 꽃잎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의 눈빛. 여름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시골길을 함께 걸으며 나누었던 느릿하지만 진솔한 대화들. 가을, 낙엽 쌓인 공원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온기에 말없이 기대었던 순간. 그리고 겨울, 창밖의 흰 눈을 배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서로의 숨소리마저 정겹게 느껴지던 그 고요함. 이 모든 풍경 속에 우리의 머뭇거림은 가장 자연스러운 배경음악처럼, 혹은 하나의 본질처럼 그렇게 녹아 있었다.
햇살 좋은 어느 주말 오후, 나는 창밖으로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뭇가지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로를 아끼고 있었구나. 이렇게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순간들마다 서로를 이토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구나.’ 숨소리 하나에도 상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 그 절대적인 안정감. 이 단단한 믿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마치 조개가 오랜 시간 이물질을 품어 마침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오랜 시간 동안 신뢰와 이해가 켜켜이 쌓이며 정성스럽게 빚어낸 결과였다. 고목의 나이테처럼, 우리 관계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묵묵히 그 깊이를 더하며 두터워져 갔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풍경이 어느 순간 찬란한 햇살 아래 그 모든 디테일을 선명하게 드러내듯,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또렷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깊은 교감은 저절로 이루어진 마법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고유성을 존중하며 함께 가꾸어온 정성스러운 정원에 더 가까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말보다 눈빛 하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더 큰 위로와 깊은 공감을 전해주는 순간들이 있다. 감정은 때로 소란스러운 고백보다 고요한 기다림 속에서 더 진실하고 순수하게 피어나는 법이다. 밤하늘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별빛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모든 것을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서로에게 전해지는 마음. 그것이 우리 관계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보이지 않는 뿌리처럼, 존재의 바닥 깊숙한 곳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주말 아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그 온기를 가만히 음미하곤 했다.
이 따뜻한 머뭇거림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아주 사소한 배려, 작지만 진심 어린 존중, 그 시작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붐비는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보폭에 나의 걸음을 맞추어 걷던 순간들. 오래된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며 눈빛으로 옅은 미소를 주고받던 어느 저녁. 지친 서로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주던 그날들의 온기. 마치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수를 놓은 비단 자수처럼, 그렇게 쌓인 무수한 시간이 우리 관계를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빚어왔다. 함께 장을 보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말없이 서로의 동선을 살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던 소박한 부엌에서의 풍경들 속에서도, 우리의 머뭇거림은 빛나는 조화로움, 살아있는 리듬으로 존재했다.
이 모든 소중한 순간들은 마치 강가의 조약돌처럼 하나하나 마음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세월과 함께 만들어진 깊은 신뢰의 공간은, 세상의 어떤 소란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견고한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변함없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게, 그리고 내일도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조용한 믿음으로. 손을 뻗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온기. 우리 마음의 흐름은 이미 자연스러운 하나의 강물처럼,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천천히, 그러나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그 안에서 매일 아침 커피 향처럼 일상 깊숙이 스며든 잔잔한 행복, 그 평온한 충만감을 마주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일 게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하나의 특별함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함께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길고 긴 여정. 때로는 서툰 붓질도 있고, 예기치 못한 색깔이 문득 섞여 들기도 하지만, 결국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만의 빛나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창조의 과정. 그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 머뭇거림은, 마치 봄꽃이 피어나기 직전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처럼 사랑과 믿음을 더욱 풍요롭게 키워가고 있었다. 결국 사랑이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함께 배워나가는 기나긴 순례의 길이 아닐까. 그 순례의 길 위에서 ‘머뭇거림’은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지혜로운 안내자와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유한 색깔과 향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함께 그려나갈 우리만의 풍경을 위한, 가장 섬세한 밑그림 작업이었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하고 더없이 든든한 존재,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 늘 그 자리에 묵묵히 존재해 온 오래된 나무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가슴 벅찬, 조용한 감동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계절을 함께 통과할 것이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비바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로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아야 하는 순간도 있겠지만, 이미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이 따뜻한 머뭇거림의 지혜는,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굳건히 지켜주는 변치 않는 등대가 되어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삶이라는 커다란 그림 위에,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랑의 색채를 겹겹이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함께 걸어온 길고 아름다운 그 길을 가만히 돌아보며, 이 모든 조용했던 순간들이 실은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지 깨닫고 따뜻하게 미소 짓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그렇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