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14편 -대화를 잘하려다 왜 싸움이 될까?

by 정성균

어느 순간, 문득 그런 의문이 안개처럼 스며오듯 피어난다. 왜 우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시작한 대화 끝에서, 서로에게 발톱을 세운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날을 세우고 마는 걸까. 어쩌면 처음부터 각자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그림자나 무심히 짊어진 삶의 무게를 품은 채 대화의 테이블에 앉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아주 분명히, 말을 꺼내던 그 순간의 마음은 한 조각의 기대와 함께 여린 풀잎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간절한 가능성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굳게 닫힌 상대의 마음의 문틈 사이로 조심스레 내 진심 한 자락을 밀어 넣고 싶었다. 내 마음도 조금은 열어 보일 수 있으리라는, 작은 용기가 샘솟던 찰나였다.


그동안 눌러두었던 사소한 서운함들. 차마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해 가슴 한편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앙금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따뜻한 햇볕 아래 펼쳐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이었어. 당신이 조금만 알아주면 안 될까." 속삭이듯 보여주면, 아주 작은 눈빛 한 번의 공감으로도 충분했으리라 믿고 있었다.


"있잖아, 얼마 전에 당신이 무심결에 했던 그 말 때문에 밤새 뒤척이며 마음이 아팠어." 어렵게 감싸 안아 꺼낸 그 마음은 결코 비난의 칼날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홀로 뒹굴던 작은 감정의 조각,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한 유리구슬 한 알 같은 것이었다.


부서질까 두려워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내민 그 마음. 상대는 의아한 표정으로, 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찰나, 작은 안도감과 함께 이 대화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겠다는 희망의 끈을 붙잡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위태로운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감돌고 있었다. 아주 잠시나마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살짝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다음 한마디에서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잔잔하던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말이다.


"그게 그렇게까지 서운할 일이었어? 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당신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꼬아서 들어?"


바로 그 지점이다.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순간. 상대는 켜켜이 쌓인 과거의 경험들로 인해 ‘비난’이라는 단어, 혹은 표정에서 공격의 징후를 감지하고 방어기제를 세웠을 수도 있다. 혹은 감정 표현에 서툴러 타인의 복잡한 마음결을 읽어내기 어려웠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상대의 아픔을 받아들일 여유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때론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기 두려워 상대의 감정을 평가절하하며 스스로를 지키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 상대는 의식조차 못 했던 목소리의 톤, 스쳐 가는 표정, 찌푸려진 미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너는 왜 유난이야?’라는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얼음송곳처럼 찌른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쌓아 올린 감정이 먼지처럼 가볍게 치부되는 순간. 투명한 유리성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허탈감. 바랐던 것은 단 한마디의 공감이었건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평가와 예민하다는 지적뿐이었다.


이해받고 싶던 나는 어느새 감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다. 고립감과 낙인의 무게가 짓누른다. 이성적으로는 상대에게 악의가 없었으리라 되뇌지만, 그 짧고 무심한 문장 속에 내 안의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리는 스위치가 숨어 있었다. "그렇게까지"라는 말은 내 감정의 크기를 멋대로 재단하는 듯했고, "별생각 없이"라는 말은 내 상처를 하찮게 여기는 오만으로 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다.


"그렇게까지라고? 당신은 항상 내가 예민하다고만 생각하는 거지? 내 마음은 늘 그렇게 하찮은 거야?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었어!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감정이 폭발하자 이성의 끈이 힘없이 끊어진다. 억눌렸던 설움과 분노가 방어기제와 함께 터져 나온다. 목소리는 한 톤, 두 톤 높아지고, 떨리며 날카롭게 퍼진다. 어쩌면 이때 '나 전달법'으로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나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상해"라 말할 수 있었다면, 혹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네 입장에서는 별일 아닐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였어"라며 풀어갔다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한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당신은 항상 부정적으로 확대 해석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해? 그리고 '항상', '언제나'라니! 내가 늘 그랬다는 거야? 그것도 당신의 왜곡이잖아!" 상대 역시 억울함에 방어적이 된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받고 싶어 하지만, 표현 방식은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과거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진심이 곡해되었던 상처가 과도한 방어를 부추긴다.


이제 대화는 서로를 어루만지는 교감이 아니라, 의도를 곡해하며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차가운 논쟁으로 변질된다. "항상", "늘", "또", "언제나" 같은 일반화된 단어들이 튀어나오고, 상대를 틀 안에 가둔다. 발버둥 칠수록 더 옭아매는 악순환이다. 마음은 부딪히며 산산조각 난다.


잊고 싶던 과거의 상처들까지 소환되어 감정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다. 이야기는 처음의 여리고 소중했던 마음에서 멀어져 간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진흙탕 싸움이 반복된다.


말의 파편은 칼날처럼 흩날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다.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는 다음 반격을 준비하거나 방어벽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적극적 경청은 사라지고,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후벼 파는 무기만 남는다.


어느 순간 상대는 고개를 돌리고 침묵한다. 무거운 한숨이 방 안을 짓누른다. 시선은 핸드폰으로 옮겨가고, 차가운 침묵 속에 비언어적 메시지가 얼음장처럼 스친다. ‘이젠 말하고 싶지 않아.’ ‘이야기는 끝났어.’ ‘벗어나고 싶어.’ 소리 없는 외침들이 가슴을 후벼 판다.


그 침묵은 격렬한 언쟁보다 더 깊은 절망감을 준다. 차라리 소리를 질렀다면 후련했을 텐데. 이 숨 막히는 정적은 남은 희망마저 삼켜버릴 듯 질식감을 안긴다. 이때 "잠시 시간을 가질까?"라는 ‘타임 아웃’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윽고 후회가 피어난다. ‘괜히 말을 꺼냈나. 차라리 참을 걸. 그냥 침묵이 나았을까.’ 말을 꺼낸 용기보다는, 어떻게 전달했어야 했는지 성찰이 뒤따른다. 바랐던 것은 긴장감도, 공격도 아닌 아주 작은 이해와 위로였을 뿐이었다.


대화의 온기는 싸늘하게 식고, 마음 사이에 깊은 강이 흐른다. 이 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막막해진다.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는 오만함, 더 이상 알려하지 않는 무관심, 삶의 무게가 인내심을 바닥내며 대화의 질을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혹은 무의식 속에 응어리진 과거의 상처가 작은 자극에도 쉽게 폭발하도록 만든다. "너 원래 그런 성격이잖아." "네가 뭘 원하는지 다 알아." 이렇게 단정 지을 때, 우리는 상대의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감정을 놓친다. 그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인데, 나는 빛바랜 사진처럼 멈춘 모습으로 판단하고 있다.


마음의 문은 조금씩 닫히고, 전하지 못한 진심들은 힘없이 스러져간다. 빛바랜 꽃잎처럼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그때, 아주 잠시만이라도, 서로의 말을 가슴으로 끝까지 들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방어의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의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불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더라면. 반박 대신 감정을 읽어내려 노력했다면. "네가 그렇게 느꼈구나"라며 감정을 반영하고, ‘타임 아웃’을 요청했더라면.


"아, 그랬구나. 네가 정말 많이 속상했겠구나. 내가 미처 몰랐어. 미안해." 이 한마디의 공감과 사과가 얼어붙은 대화에 온기를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붉어진 눈으로 멋쩍게 웃으며 차 한 잔을 마시고, 밤새 이야기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싸움이라 부르는 갈등은 인정받지 못한 마음과 보듬어지지 못한 외로움이 쌓여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제때 받지 못한 위로, 충분히 전해지지 못한 관심, 용기 내어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한계점에서 둑 터지듯 터져 나온다. 작은 불씨가 거대한 산불로 번지는 과정처럼. 처음 불씨가 피어날 때 서로를 조금만 더 살폈더라면, 이 절망적 불길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토록 격렬했던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처럼 휑한 공허함만 남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서글픔, 쉽게 메워지지 않는 차가운 거리. 그러나 이 폐허 속에서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용기는 이 절망을 마주한 뒤에 싹튼다. 깨어진 파편을 맞추려는 노력, 어색함을 무릅쓰고 건네는 사과, "아까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미안해.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이 진심 어린 말이 얼어붙은 관계에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 쉽지 않지만, 상처를 보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성숙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냉랭한 거리감 속에서 우리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처음 어렵게 말을 건넸던 그 순수한 마음은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그리고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야 할까.

어쩌면 해답은 방어를 내려놓고 판단 없이 수용하는 자세에서 시작될 수 있다. "네 마음이 그랬구나." 하고 속삭이며, "앞으로는 더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할게"라는 약속을 나눌 수 있다면.


다음번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들어볼 수 있기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서로의 진심을 놓치지 않고,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