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15편 - 틀 안에 가두지 않는 사랑

by 정성균

사랑이 한 사람의 마음에 아주 조용히 뿌리를 내릴 때면, 세상의 모든 것은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어 간다. 계절이 눈에 보이지 않게, 하지만 온전히 스며들어 어느새 풍경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이 처음으로 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품었던 소망은 참으로 단순하고 투명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그의 해사한 미소가 따스한 햇살처럼 내 하루의 모든 순간을 구석구석 환하게 비추기를. 고단한 하루의 끝, 붉은 저녁노을이 고요히 질 때쯤이면 오늘 하루도 그가 세상의 어떤 소란에도 다치지 않고 무탈하고 평안했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전부였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하게 흘러나오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나란히 걷던 가로수길에서 우연히 손끝이 스쳤을 때 온몸으로 번지던 작고 선명한 떨림, 그가 좋아하던 노래를 으레 나도 좋아하게 되어 한가로운 오후 내내 함께 흥얼거리던 나른함. 그 눈부시게 소소한 순간들이 하나둘 모여, 어느새 내 세상의 전부를 이루고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어떤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는 지극히 순수한 기도의 모습으로 내게 찾아왔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강물 위로 사랑의 배가 더 깊이 나아가면서, 그 물빛의 농도가 짙어지는 만큼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서늘한 새벽안개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온전히 소유하고픈 마음, 그늘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던 마음에 서서히 드리워진, 혹여 이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의 그림자. 어느새 그의 하루가 내 삶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중심축이 되어버렸고, 그의 아주 사소한 침묵마저 잔잔한 호수 같던 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무거운 돌멩이가 되었다.


메시지 옆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길어졌다. 그의 소셜 미디어에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사진 한 장에, 나는 밤새도록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마음을 스스로 할퀴었다. 저릿한 긴장감 속에서 잠 못 들고 하염없이 맴도는 영혼. 그렇게 사랑이라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이름 아래, 배려와 애정이라 굳게 믿었던 나의 지극한 관심은, 실은 보이지 않는 ‘기준’이라는 날카로운 틀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믿을 수 없이 견고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같았던 그 틀의 경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운 강철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바빴어”라는 그의 짧고 무심한 한마디에, 나는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의심의 시나리오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숨이 가빠졌다. 통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밤이면, ‘혹시 마음이 변한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이, 또 다른 이야기가 그에게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날카로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불안과 의심은 끈질기게 밤을 잠식했고, 더 이상 그의 행복을 순수하게 빌어주는 것만으로는 내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관심과 표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때마다, 내 안 어딘가에 아주 오래전부터 묻혀 있던 깊은 결핍감이 소리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문제, 스스로를 오롯이 사랑하고 채우지 못했던 텅 빈 허기의 거대한 그림자였다.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다는 그 갈망을, 나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의 상실을 견뎌내지 못하는 내면 깊은 곳의 뿌리 깊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감정의 왜곡일 뿐이었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오히려 사랑의 숨통을 조이는 지독한 역설 속에, 나 스스로 갇혀 있었던 것이다.


변화의 신호는 그에게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아프게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 앞에서 부쩍 말을 아꼈고, 하루 동안 있었던 시시콜콜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더는 즐겁게 꺼내놓지 않았다. 마치 내가 던질지도 모르는 질문들을 미리 예상하고 빈틈없는 방어벽을 치는 사람처럼, 그의 눈빛에는 늘 희미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깊고 어두운 수렁으로 가라앉았고, 묵직한 서운함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속수무책으로 덮쳤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멀어져 버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숨 막히는 침묵의 끝에서 그가 조용히 내뱉은 한마디. “가끔은… 나도 숨 좀 쉬고 싶어.”


그 말이 예리한 비수가 되어 내 심장 한가운데로 정확히 날아와 박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붙든 채, 길고 아픈 그 밤을 통과해야 했다. 그제야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쌓아 올린 것이, 실은 두 사람이 함께 쉴 아늑한 보금자리가 아닌,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옥죄는 견고한 감옥이었음을. 그를 위한 배려와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행동이, 사실은 나 자신의 불안을 채우기 위한 지독한 이기심과 집착이었음을, 더는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만든 틀 속으로 억지로 끌어당겨 내 입맛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가장 그 다운 모습으로, 가장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도록, 내 안에서 들끓는 불안과 조급함을 기꺼이 내려놓는 일임을 너무나 아프게 배워야 했다. 물론 그 고통스러운 배움은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불안은 오래된 습관처럼 수시로 다시 밀려왔고, 그의 마음을 열어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은 날카로운 파도처럼 마음을 거듭 할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지긋지긋한 불안이 그의 어떤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걸음과 숨결, 그의 침묵과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내 안에서 솟구치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파도들은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끌어안아야 할 몫임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쳐가고 있다.


어느 늦은 저녁, 식탁 위에서 그의 핸드폰이 조용히 깜박이며 새 알림을 알린다. 예전의 나였다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누구의 연락인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온몸이 사로잡혔겠지만, 이제는 서두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창밖의 고요한 어둠으로 시선을 돌리고, 내 손안에 담긴 따뜻한 찻잔의 온기에 천천히 머문다. 식탁 위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미세한 김이 허공으로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잔잔한 증기처럼, 내 안의 불안도 이제는 조금씩 그렇게 흩어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의 하루도, 그리고 나의 하루도 각자의 자리에서 온전하게, 그리고 서로에게 존중받으며 흐르고 있음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 단단한 믿음 속에서 기다림은 더 이상 초조한 불안의 동의어가 아니라,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고 고요한 선물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쌓아 올린 감옥의 벽을 나 스스로 허물자, 그는 오히려 더 자주, 더 편안하게 내 곁에 머물렀다. 그는 내 곁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숨을 쉬었고,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던 마음의 거리는 더욱 건강하고 단단하게 여물어 갔다. 사랑은 언제나 이런 아름다운 역설 속에서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그리고 더 깊게 자라나는 모양이다.


사랑을 배운다는 건 결국, 내 안의 깊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수많은 틀을 매일 조금씩 허물어가는 지난한 여정이다. 그는 결코 내 기준과 통제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며 스스로 고유한 빛을 품고 선 하나의 온전한 우주임을 인정하는 것. 이제 나는 한 걸음 뒤에서, 세상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그라는 우주를 그저 바라본다. 그의 숨결을 느끼고, 때로는 조금 빠르거나 느린 그의 보폭에 나의 걸음을 기꺼이 맞추며,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나란히, 함께 걷는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내 곁에 두려는 안간힘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다스려 마침내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찾는 길이었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가장 깊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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