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 그날, 아내의 한마디가 조용히 내 마음을 흔들었다
애정이라는 감정의 지형도를 펼쳐본다면, 우리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우리는 맹렬한 불을 내뿜던 뜨거운 화산이었고, 때로는 서로를 할퀴며 휘몰아치던 격정의 바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이름의 무심하고도 집요한 조각가는 그 모든 격렬한 윤곽을 서서히 깎아내고 마모시키며, 이제는 더없이 잔잔한 분지처럼 우리를 남겨두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안정은 머물렀지만, 한때 심장이 품었던 뜨거운 용암의 기억은 풍화된 암석처럼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살다 보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서로의 존재가 자연스레 스며드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잃는 아쉬움이 아니라,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근하게 번져가는 무채색의 변화에 가깝다. 동트기 전의 설렘이나 해 질 녘의 애틋함 같은 감정들은 어느덧 서랍 속 가장 깊은 곳으로 밀려나 먼지 속에 잠들어간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삶 또한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애틋함이 특별한 장식물이 아닌, 숨 쉬는 공기처럼 배경이 되어가는 시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는 세월의 풍경이란 어쩌면 이런 모습 아닐까.
결혼 생활은 늘 묘한 결을 지닌 길이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한밤의 울음소리가 집 안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던 정신없는 시간이 있었다. 삶의 무게를 나란히 감당하며, 아이의 열에 밤을 새우고, 서로의 지친 어깨를 말없이 토닥이던 나날 속에서 우리는 뜨거운 연인이라기보다는 등을 기대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동반자로 변해갔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내의 미간에 스친 주름에서 하루의 피로를 읽고, 무심히 내민 손끝의 미세한 떨림에서 마음속 짐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능숙한 독심술사가 되어갔다. 아마 당신의 일상에도 이런 장면이 스며들어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만났을 때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던 그 벅참은 이제 빛바랜 풍경화처럼 기억의 복도 한편에 걸려 있다. 대신 나란히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한 리듬만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물론 그 강이 항상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거센 여울을 만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물길로 흩어졌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넓어진 물줄기로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든 다툼과 화해의 흔적이 쌓여 보이지 않는 지층처럼 우리를 단단히 이어주고 있었음을,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흘러갔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하루의 소란이 모두 가라앉고, 세상의 소음조차 멀어진 듯한 평범한 밤. 훗날 떠올려도 사진 한 장 남지 않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런 밤.
식사를 마친 뒤 거실에는 식지 않은 음식의 온기와 함께 나른한 평화가 머물고 있었다. 나는 낡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의미 없이 채널을 넘기며, 화면 너머의 목소리들을 소음처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물 끓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잠시 후, 아내가 찻잔 두 개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가왔다. 하얀 김이 실처럼 피어오르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한마디를 건넸다.
“오늘 낮에 단골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데, 문득 당신 생각이 나더라.”
그 말에는 특별한 사연도, 기승전결도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스쳐간 한순간의 생각을 무심히 흘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꾸밈없는 그 한마디가 수십 년간 고요하던 내 마음의 수면을 조용히 흔들었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조약돌 하나가 또르르 떨어지며 맑은 파문을 그리는 듯, 그 울림은 잔잔하고도 투명하게 번져갔다.
나는 리모컨을 든 손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매일 보아오던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저 사람의 시간 속에 내가 그렇게 문득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충격처럼 스며들었다. 오래전 첫 데이트에서 마주했던 미소처럼 잊고 있던 웃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올랐다.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 안에서는 분명 작은 물결이 일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설렘’이라는 이름의 덧없고 불안한 감정을 내려놓고 대신 서로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평온을 얻었다고 믿어왔다. 원숙한 부부란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그 고요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날 밤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쌓인 자리마다 고요히 스며드는 순간들이 있음을. 눈에 띄지 않던 그 작은 숨결들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흔들고 있음을.
그날 이후, 내 시선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침 출근길, 현관 앞에서 손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남았다. 피로에 지친 저녁, "다녀왔어" 하며 맞아주는 미소의 주름에서도 이전에는 놓쳤던 따뜻함이 새삼 느껴졌다. 주말 아침,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아내의 익숙한 어깨선을 바라보다 이 순간을 오래 담고 싶어 핸드폰 셔터를 조용히 눌렀다. 무심히 흘려보내던 일상이 하나둘 빛을 머금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 세계가 다시 조금씩 빛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뒤,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늦은 퇴근길을 지나 불 꺼진 거실을 조용히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식탁 위에는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당신 좋아하는 김치찌개, 따뜻하게 데워놨어요.’
어느 공책 한쪽을 급히 찢어낸 듯한 작은 메모지 위에, 아마도 서둘러 적은 듯 삐뚤빼뚤한 글씨. 그 서투른 다정함이 왈칵 가슴을 적셨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매일의 소박하고 평범한 장면들 속에 스며드는 진심. 그 소박한 순간들이 내 안에 잊고 있던 애정의 꽃을 다시 피워주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의 온기가 메모를 쓴 아내의 마음결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따뜻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걷고 있다. 햇살 좋은 주말이면 공원의 흙길을 나란히 걸으며,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우산 속으로 몸을 기댄다. 말이 없는 침묵의 시간조차 더는 어색하지 않다. 젊은 날의 불안한 침묵과는 전혀 다른, 말보다 깊은 평화와 신뢰가 그 고요를 채우고 있다. 오래 함께한 이와 나란히 걷는 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충만함. 당신도 이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오랜 친구와 한적한 카페 구석자리에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담소를 나누던 중 그가 물었다.
“자네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좋아 보여? 권태기는 없나?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이 조용하고도 경이로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참을 머뭇거리다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비결 같은 건 없어. 그냥 어느 날 잊고 있던 마음의 스위치가 다시 켜지더군.”
그랬다. 우리의 감정은 멀어진 것도, 꺼져버린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가장 낮은 불로 조용히 데워지고 있던 온기의 스위치였을 뿐이다. 나는 그 스위치가 이미 고장 났다고, 혹은 사라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한마디와 다정한 메모 한 장이 먼지 쌓인 다이얼을 다시 조금 더 밝은 쪽으로 돌려놓았다. 부부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른다. 불꽃이 사그라진 뒤에도 긴 강을 함께 건너며 이어지는 조용한 온기. 그리고 아주 작은 계기만으로 다시금 환하게 밝혀지는 마음의 불빛.
이제 우리의 감정은 더 이상 폭발하던 화산도, 소용돌이치던 바다도 아니다. 나란히 걷는 강가의 풍경처럼 한없이 잔잔하다. 봄이면 얼었던 마음의 강이 녹아 새순이 돋고, 여름이면 신뢰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서로의 눈빛처럼 강물이 투명해지고, 겨울이면 서로에게 기대어 침묵 속 온기를 나누는 사계절의 강물처럼 순환하며 흐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따뜻한 강가를 함께 걷고 있다. 이 여정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이 모든 풍경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빛나고 있다는 사실. 그 강물은 내일도 소리 없이 우리 곁을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