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17편 - ‘당신 때문에’라는 말의 잔인함

by 정성균

얼마 전에도 나는 결국,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 때문에.’


나는 이 말을 칼날처럼 품고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말을 무심코 내뱉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늘 두려움을 느낀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완결적이며, 이렇게나 잔혹하게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말이 또 있을까. 그것은 대화의 끝이자 관계의 균열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주말 밤, 거실의 낡은 소파에 나란히 몸을 기댄 채 늦은 밤 영화를 보고 있었다. 캄캄한 거실을 채우는 것은 오직 텔레비전 화면의 불빛과 희미한 대사 소리뿐이었다. 아내는 익숙한 솜씨로 사과를 깎아 내밀었고,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 반평생을 함께한 사람의 온기가 담요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공기 속에 자연스레 섞여들던, 고요하고 충만한 밤이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고요했던 거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린 나의 시선 끝에, 짙은 갈색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맨발 바로 앞에 날카로운 사금파리 조각이 달빛처럼 차갑게 빛났다. 다칠 뻔했다는 아찔함보다, 나의 소중한 것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먼저 심장을 찔렀다. 아내가 신혼 초에 큰맘 먹고 사준, 내가 수십 년을 아끼며 매일 아침의 시작을 함께했던 커피 머그잔이었다. 내가 잠시 영화에 한눈을 판 사이, 무심코 팔을 뻗던 아내의 팔꿈치가 테이블 위 머그잔을 스쳐 지나갔다. 입 안에서 차갑게 맴돌던 그 말이, 기어이 독처럼 터져 나왔다.


“당신 때문에!”


고작 세 글자에 불과한 이 짧은 문장은 그 순간 날카로운 창이 되어 망설임 없이 아내의 가슴을 겨누었다. 동시에 그것은 견고한 방패가 되어 나의 부주의와 실수를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이 말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모든 잘못은 너에게 있다’고 일방적으로 판결을 내리고, ‘나는 이 사건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관계 속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한번 내뱉어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거실 가득 퍼져 있던 따스한 온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아마 이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웃음을 나누던 두 사람이,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서로를 겨누게 되는 그 어색하고 서늘한 공기. 나는 어느 틈엔가 아내의 당혹스러운 침묵마저 유죄의 증거로 삼고, 그녀의 지친 한숨마저 무성의함으로 몰아세우는 냉혹한 심판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아늑했던 집은 차가운 법정으로 바뀌었고, 오랜 세월 함께 쌓아 온 정과 신뢰는 유무죄를 가리는 치열한 공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아내는 피고인이 되어 입을 꾹 다물거나, 힘없는 목소리로 “미안해요, 미처 못 봤어요”라며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말 대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무거운 기류만이 방 안에 머물렀다.


나는 왜 그토록 이 잔혹한 말에 매달렸을까. 그 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늘 완벽하고 강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 애써 감춰 두었던 나의 초라함이었다. 아끼던 물건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사소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실수를 온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비겁한 자존심.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처럼, 나는 타인의 실수는 그 사람의 본성 탓으로, 나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으로 돌리는 함정에 충실히 빠져 있었다. 결국 ‘당신 때문에’라는 외침은 ‘나의 이 초라하고 무능한 민낯을 당신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또 다른 사소한 다툼 끝에 습관처럼 비난의 말을 쏟아내던 내 앞에서 아내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변명도, 체념도 없었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그 역광 속에서 아내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아주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은 ‘네 말이 맞다’는 수긍도, ‘두고 보자’는 경고도 아니었다. 오랜 슬픔과 깊은 피로가 켜켜이 쌓인 끝에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표정. 그림자 진 얼굴 위로 감정이 다 마모되어 버린, 그래서 더는 상처받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듯한 공허함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 텅 빈 표정 앞에서, 나의 모든 논리와 날 선 비난과 한평생 지켜온 자존심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가슴 한복판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폐허로 만들고 그 위에 홀로 서 있었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생각의 문법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습관처럼 상대를 향하던 비난의 화살을 거두고, 그 화살이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이었다. 심리학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인지적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박혔다. 어떤 사건 자체는 중립적이며,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해석’이 감정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개념이었다. 내 분노는 아내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나를 무시하는 부주의함’이라고 해석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연습은 쉽지 않았다. 아내가 약속 시간에 늦던 어느 저녁, 내 안에서는 또다시 익숙한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이건 무시야.’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 나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깐. 정말 아내가 나를 무시해서 늦는 걸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퇴근길에 차가 막혔을 수도 있고,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지. 이 상황을 꼭 ‘무시’라고 해석해야만 할까?’


생각의 틀을 바꾸자 다른 감정이 들어설 공간이 생겼다. 분노가 있던 자리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지친 얼굴의 아내가 들어섰다. 이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었어!”라는 비난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걱정했네.”


내 말에 아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차가 너무 막혀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당신 때문에’라는 말은 사실과 감정을 뒤섞어 상대를 공격하는 가장 손쉬운 무기였다는 것을. 그 무기를 내려놓고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 비난 대신 대화가, 분노 대신 염려가 싹틀 수 있었다.


‘당신 때문에’라는 말은 너무나도 편리한 주문이다. 그러나 그 주문은 결국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관계를 병들게 한다. 진정한 변화는 표현 방식을 바꾸는 것을 넘어, 세상을 해석하는 나 자신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나의 감정이 상대방이 아닌 나의 해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로를 탓하는 대신, 서로의 상황을 먼저 헤아려보는 것.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금 더 너그러운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어쩌면 그 작은 마음의 전환에서부터, 우리의 관계는 다시 건강하게 숨 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서투른 연습은 아마 평생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나의 의지일 테니. 나는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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