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18편 - 나는 아직 다정함을 배우는 중이다

by 정성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더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부터 마음속에 납덩이가 가라앉는 듯한 날들.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능숙한 연기자가 되어야만 한다.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적당한 미소를 지어 보여야 하고,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쳐야 한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하고,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 따라 내 감정의 색깔을 시시각각 바꿔야 하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소모시킨다. 하루라는 무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나는 무대 뒤에서 두꺼운 분장을 지워내는 배우처럼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또 하루를 무사히 '연기'해냈다는 피로감만이 텅 빈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나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 중에 쌓아 올린 방어벽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그 벽 안에서 나는 안전하지만, 동시에 고독하다. 벽 너머의 세상과 나 사이에 낀 그 어떤 진심도 희미해지는 기분. 하루의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또 나 역시 상처 주지 않으려는 방어적인 노력에 다 써버린 채, 텅 빈 나 자신과 마주하는 밤이 늘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가끔은 어떤 사람 앞에서 그 견고하던 벽이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특별한 위로나 행동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 괜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사람 앞에서는 내가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거나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굳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리저리 헤매는 못난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흉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그 사람의 존재는 내 주변의 공기를 바꾸고, 그 사람 앞에서는 비로소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내 안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나는 그제야 무거운 갑옷을 벗고 맨몸으로 앉아 있을 용기를 얻는다.


그 사람의 말투에는 사람을 재촉하는 조급함이 없고, 표정엔 수많은 날들이 쌓여 만들어진 잔잔한 시간이 묻어 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길어지고 두서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때조차, 그저 묵묵히 시선을 맞춰주는 태도. 그 고요한 기다림, 그 판단하지 않는 시선이 주는 여백이야말로 막혀 있던 숨통을 트이게 한다. 다정함이란, 어쩌면 백 마디 말보다 그렇게 조용히 상대방에게 온전한 시공간을 내어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엔 그런 다정함을 일종의 타고나는 기질이라 여겼다. 말이 많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 쉽게 흥분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늘 차분한 호수를 닮은 마음을 지닌 사람. 나는 수시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고,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소란을 다독이기보다 날것 그대로 터뜨려 버리는 데 더 익숙했으니까.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할까’ 자책하며, 그들의 고요함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질투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알려주었다. 내 곁을 오래 지켜온 사람들을 통해, 나는 다정함이 천성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그것도 아주 사소하고 고된 순간들의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 선 말을 내뱉는 대신, 입안의 쓴맛을 느끼며 꿀꺽 삼키는 연습. 나의 주장을 펼치고 싶은 강한 욕구를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상대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들어주는 인내. 내가 무조건 옳다는 오만한 생각보다,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할까’ 하고 먼저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보려는 작은 자세. 마치 서툰 악기를 배우듯, 삐걱거리고 실수투성이인 노력들이 모여 마음의 근육을 만든다. 그런 티 나지 않는 분투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날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다정한 사람들의 말에는 상대와 보폭을 맞추는 일정한 호흡이 있다. 함부로 말을 끊어먹지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충고하려 들지도 않는다. 몇 해 전,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겪고 머릿속이 벌집을 쑤신 듯 엉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를 만나 같은 말을 돌려 말하고 또 말했다. 분노와 서러움에 뒤섞여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진작에 끊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어쩌라는 거야” 한 마디쯤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가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낼 때까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나의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 견뎌주었다. 마침내 내가 지쳐 말이 끊긴 그 순간, 친구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 그 짧은 두 마디 말속에, 기나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려준 그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날의 온기는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스며들어 나를 아주 오랫동안 따뜻하게 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신뢰의 항구가 되었다.


다정함은 여전히, 그리고 아마 평생 나에겐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만,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말은 늘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온다. 특히 온종일 일에 시달려 몸도 마음도 지친 날이면, 내 안에 간신히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줌의 여유조차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흩어져 버린다. 다정함은 ‘마음의 체력’이라는 말을, 나는 그런 무너지는 밤들을 수없이 겪으며 조금씩 배운다. 체력이 바닥났을 때 작은 언덕조차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듯, 마음의 체력이 고갈되면 사소한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고 만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계기는 화사한 결혼식이나 기쁨 넘치는 돌잔치가 아닌,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장이었다. 향냄새 자욱한 공간 속에서 어색하게 상복을 입은 친구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드려주고, 오랜만에 마주한 우리들은 검은 넥타이를 맨 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들이었다. "혈압은 괜찮냐", "자식들은 이제 다 컸냐"는 현실적인 대화는 어느새 빛바랜 앨범을 넘기듯 젊은 날의 철없던 추억으로 흘러갔다. 잠시 웃고 떠들다가도, "이제 우리도 갈 때가 머지않았다"는 누군가의 씁쓸한 농담에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잃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보았다. 하나둘 희끗해진 머리카락과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눈가의 주름을 보며, 함께 늙어간다는 것의 서글픔과 전우애와도 같은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다음에는 꼭 좋은 일로 보자’고 말했지만, 그 약속이 점점 더 지키기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나눈 다정함은, 시끄러운 위로나 값싼 동정이 아니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서로가 지나온 시간을, 그리고 남은 시간을 말없이 인정해 주고 함께 짊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우리 안에서 감정이 폭풍처럼 쏟아지려 할 때, 그 거친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상대의 표정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땐,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기보다 먼저 물어보는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을. “무슨 일 있어?” 어쩌면 그 한마디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장황한 설명보다 “그랬구나” 그 말 한 줄이 훨씬 더 깊은 위로가 되는 순간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겪어오지 않았는가. 이 서툰 배움은 아마 평생 계속될 것이다.


물론, 애써 건넨 다정한 마음이 언제나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잔뜩 지쳐 보이는 동료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가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차가운 반응에 머쓱했던 날도 있고, 좁은 골목길에서 먼저 가라고 양보했지만 고맙다는 비상등 한번 없이 쌩하고 지나가버린 차에 허탈했던 적도 있다. 그런 날은 괜히 나 혼자 애쓴 것 같아 마음이 주저앉는다. 나의 작은 선의가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기분이다. 다정함을 건네는 것은 스스로를 무방비하게 만드는, 일종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거절의 상처는 더 쓰리다.


하지만 관계란 결국, 누가 먼저 기다려주고 다시 손 내밀 수 있는가의 문제 아닐까. 서로 다른 삶의 온도를 지닌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작은 틈을 메워가는 일이니까. 진정한 다정함은 나의 선의가 거절당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너그러이 끌어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용기를 내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런 연습을 매일같이 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다정함은 오히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 가장 진하게 피어난다. 늦은 밤, 고단하게 들어온 가족의 신발을 말없이 반듯하게 돌려놓는 손길. 아이가 들려주는 시시하고 엉뚱한 이야기 앞에서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온전히 눈을 맞추는 마음. 말없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동료의 피로를 함께 안아보려는 마음.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화단을 가꾸는 일과 같다. 그 순간들은 누구의 칭찬도 기록도 없이 티 나지 않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신뢰와 안정감은 거름을 먹고 자라는 나무처럼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결국, 타인에게 다정해지기 위해선 내 안의 소란부터 잠재워야 한다. 마음이 온통 뒤집힌 채로는 그 누구에게도 고요한 호수가 되어줄 수 없으니까. 말이 목까지 차오를 때, 그 한마디를 꾹 누르고 숨을 고르는 아주 짧은 멈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그 찰나의 고요, 그 작은 틈이 바로 지혜와 다정함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짧은 시간의 평온이 뜻밖에도 깊은 온도를 지닌 다정함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말하더라. 다정함은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느냐의 문제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상대의 반응을 미리 예측하고 계산하기보다, 그저 나의 온도를 먼저 꺼내 보이는 것. 그 조심스러운 손길 하나가 얼어붙은 관계에 온기를 불어넣고, 한 사람의 따뜻한 시선이 때로는 둘 사이의 삭막했던 계절을 통째로 바꾸기도 하니까.

아마 우리는 모두, 이 서툰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함을 배우는 중일 것이다. 결심하고, 실패하고,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를 돌아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얼굴을 붉히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완벽하지 못했던 어제의 나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 말자. 그것은 오늘의 나를 좀먹을 뿐이다. 오늘은 그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눈빛 하나라도 조금 더 따뜻하게 건네보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완벽을 목표로 삼기보다, 아주 작은 방향의 전환만으로도 족하다.


그렇게 하루를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의 지친 마음을 말없이 감싸줄 수 있는 그런 너른 자리에 닿아 있을지도 모르지. 완벽하지 않아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렇게 살아보면 어떨까. 우리 안의 온도를 조금 더 따뜻하게 데우는 일부터,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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