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 그 말을 꺼내지 못한 날
친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짧은 말 앞에서 감정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도, 괜찮냐는 인사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마디 건넬 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버린 소식 앞에서 마음은 무겁게 쏟아졌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슬픔은 분명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날의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내가 낯설었다. 수많은 단어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어딘가 부족할 것 같았고, 어떤 표현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어는 마음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지만, 감정이 크고 무거울수록 말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랬구나.”
“이제는 편안할 거야.”
“그래도 마지막은 가족들 곁에서…”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끝내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내 말이 그의 슬픔을 가볍게 만드는 건 아닐까, 위로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덧칠을 하게 될까, 여러 번 망설였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곁에 앉아 있었다. 말 대신 침묵을 골랐고, 그 침묵이 유일한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떴다. 눈빛을 맞추지 않았고, 표정은 서로 닿지 않은 채 엇갈려 있었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도 말은 없었다.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각자의 감정은 제자리에서 맴돌았고, 어쩌면 그 거리만큼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었던 애도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나, 친구의 손을 놓지 않던 그의 누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아무 말 안 해주셔서… 고마웠어요. 말보다 그 조용함이 더 큰 위로였어요.”
그 이야기는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 무거운 감정을 남겼다. 침묵이 위안이 되었다는 말보다, 그 언어를 끝내 내뱉지 못했던 나 자신이 마음에 걸렸다. 그 선택은 조용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한 방어였을까.
나는 종종 슬픔 앞에서 입을 다문다. 조심스러움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도 하지만, 내 속내를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괜찮냐’는 말이 지나치게 가볍게 들릴까 봐, 혹은 내 진심이 오해될까 두려워 망설였던 순간들이 있다. 그때의 침묵을 관계에 대한 배려라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나를 위한 선택이었던 적이 많았다. 우리는 언어를 아끼는 것이 다정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침묵이 다정함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어떤 고요함은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말할 용기를 잃었다는 고백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잘 가더라.”
“이젠 더는 아프지 않겠지.”
“좋은 곳에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마음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슬픔을 빨리 정리하자는 조급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슬픔은 누군가의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고,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소화되어야 하는 감정이다. 언어로 이끌거나 유도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날의 나는 처음으로 깊이 느꼈다. 조용히 곁에 머무는 시간이, 때로는 어떤 말보다도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위로는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머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언어에는 방향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는 위로의 형식을 띠지만, 그 속에는 거리가 스며 있다. 반면 어떤 이야기는 특별한 의미 없이 들릴 수 있어도, 곁에 머무는 데 집중하는 표현일 수 있다. 내가 그날 하지 못했던 언어는 아마도 함께 걷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해답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표현.
“힘들겠다.”
“그 말, 듣기만 해도 너무 아프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짧은 언어들은 마음의 깊이에 오래 머문다. 말은 목적이 아닌 태도로 머물며, 감정의 흐름에 맞춰 존재 방식을 조절한다. 정보나 해결책이 아니라, 함께 있다는 확신. 슬픔 앞에 있다는 것, 그 옆에 계속 있을 것이라는 조용한 약속.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또 다른 슬픔 앞에 섰다. 그때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지금의 나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내기보다, 기다리는 언어를 선택한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여기 있을게.”
“네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게.”
“마음이 괜찮아지는 날, 그때 이야기를 들려줘.”
이 표현들은 어떤 해결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여백을 만든다.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는 통로. 서두르지 않는 태도 안에서 감정은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은, 그들의 시간을 온전히 인정하는 일이다. 빠르게 건네는 표현보다, 늦게라도 진심으로 가닿는 감정이 오래 남는다.
기다림의 태도는 ‘비워둔 자리’를 만들어 준다. 설명 없이, 조언 없이, 판단 없이 열어두는 공간. 마치 아무도 앉지 않은 빈 의자처럼, 그러나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너비를 가진 그곳에서 슬픔은 조심스레 풀려나오고, 마음은 스스로의 리듬을 따라 회복된다. “가장 큰 위로는 종종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순간’에서 온다.” 말을 하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태도는 그런 감정을 선물한다. 언어가 없어도, 존재는 충분히 전달된다. 조용한 동행이 주는 안정감. 그곳에서 감정은 숨을 고르고, 서서히 이름을 얻는다.
감정 없는 이야기는 흔들리고, 감정만 앞선 이야기는 길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먼저 마음을 준비한다. 상대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며, 곁에 있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 마음가짐은 단순히 상대방을 향한 이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일에서 출발한다. 나의 불편함, 조급함, 해결하고 싶은 욕구를 인식하는 일. 그렇게 내면을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감정 앞에 조심스레 설 수 있다.
함께 있는다는 것은 거리를 좁히는 일이 아니다. 감정적 동반자가 되어주는 일이다. 혼란스러운 감정 앞에서,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그 존재는 아무 말 없이도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가장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떤 언어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는 위로는 바로 이 존재에서 비롯된다. 침묵 속에서도 감정은 움직인다. 함께 멈추어 있는 시간, 그 시간이 건네는 의미는 어떤 이야기보다도 깊고 조용하다.
나는 바란다. 그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가닿기를.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건 문장이나 형식이 아니다. 그 사람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진심. 존재 자체로 곁에 있으려는 의지. 그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닿을 때, 위로는 시작된다. “조심스럽게 머문 마음은 짧은 말보다 오래 기억된다.” 결국, 슬픔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완벽한 언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 그 자체다.
이 글은 말보다 먼저 얼어붙은 마음에서 시작해, 기다림과 침묵, 존재의 태도까지 이어지는 위로의 여정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