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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9편 - 내 마음을 지키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법

by 정성균

― 관계를 망치지 않는 작은 습관들 ―


서로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던 날, 옆자리에 앉은 이가 의자를 바짝 붙이고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없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고 화면을 안쪽으로 돌렸다. 그저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함이 밀려왔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신호는 오간다. 사람 사이도 이와 같다. 다가오는 속도가 빠르면 먼저 방어가 작동한다. 작은 감지, 거리 조절, 긴장 상태.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해도 감정은 늘 먼저 반응한다.


정서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세밀하게 움직인다. 어떤 날은 작은 다가섬조차 반갑지만, 또 어떤 날은 말 한마디가 깊이 파고든다. 누구나 감정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같은 말도 어느 날은 유쾌하고, 또 어떤 날은 불쾌하다. 기분, 체력, 기억 속의 사소한 일들까지 영향을 미친다. 거리에는 규칙이 없다. 그 불확실함을 함께 감지하는 사이에서 관계의 리듬이 형성된다. 표정, 목소리의 떨림, 말 없는 틈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가늠한다. 편안하다는 감각이 들 때, 비로소 관계는 흐른다.


가까워지려는 마음보다, 과하지 않은 감각이 더 중요하다. 이는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정신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이유로 깊이 파고들거나, 개인적인 질문을 쉽게 던지는 일은 부담을 만든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상대의 경계를 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진짜 친밀함은 경계를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 관계는 줄타기와 닮았다. 치우치면 기울고, 멀어지면 연결이 약해진다. 감정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느끼고, 불편함이 피어나기 전에 물러서는 태도가 필요하다.


경계는 예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건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그 말이 내게 깊은 선을 그었던 날이 있다. 조심스레 꺼낸 말에 돌아온 반응은 단호했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은 단어 몇 개에 의해 축소됐다. 이후로 그와의 대화는 어디선가 균열이 생겼다. 진심이었다는 말이 전해지지 않은 건, 말의 방식이 마음을 얼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 경계가 필요하다.


경계는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울타리다. 감정을 살피지 않는 말, 기분을 지워버리는 판단, 조언을 빙자한 간섭은 그 울타리를 허문다. 사람들은 흔히 ‘선을 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선의 위치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경험, 상처, 가치관에 따라 경계의 형태는 달라진다. 어떤 농담은 누군가에게는 가볍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깊은 상처다. 감정을 재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너를 위해서 그래.”


이런 말들은 경계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진심은 판단보다 받아들임에서 드러난다.


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조금 더 듣고 싶어.”


이런 말은 경계를 단단하게 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인정하려는 태도가 관계의 기반이 된다. 존중은 말보다 침묵에서, 조언보다 기다림에서 깊이 드러난다. 감정을 다루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조급한 충고보다 시간을 내어주는 태도다. 서둘러 해결하려는 마음, 결론부터 내리려는 말들은 관계를 지치게 한다. 경계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와 타인을 함께 지키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예의다.


가까움에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있다. 거칠게 말해도 허물없는 사이였지만, 그가 종종 던지는 말이 마음을 걸리게 했다.


“넌 원래 그런 애잖아.”


“내가 너를 얼마나 잘 아는데.”


이런 말들이 반복될수록 내 모습은 한 틀에 고정되는 듯했다.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보다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내가 더 중요해졌다.


가까움은 고정된 이미지로 타인을 가두기도 한다. 변화와 복잡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익숙한 틀로 사람을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누구나 변한다. 삶은 변화를 품고 흘러가고, 사람 역시 그러하다. 오래된 기억에 기대어 상대를 판단하는 건, 지금의 그를 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말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자주, 친하다는 이유로 말을 쉽게 던지고, 감정은 뒤로 미뤄둔다.


“가족끼리 뭘 그래.”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이런 말은 친밀함을 빌미로 한 강요일 수 있다.


진짜 친밀함은 독립성과 감정의 리듬을 존중하는 데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생각은 오해를 낳는다. 웃는 얼굴이 피로를 가릴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변화를 수용하려는 태도, 귀 기울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는 물리적으로 멀어지지 않아도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다. 느끼는 쪽이 먼저 멈추고, 침묵하고, 마음을 접는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 감정을 지키는 기술들


첫째, ‘괜찮아’라는 말보다 나의 감정을 먼저 살핀다.
퇴근길, 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탁이 잦았던 사람이다. 이번에도 마감이 급하다며 문서를 봐달라고 했다.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습관처럼 “알겠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친 표정조차 감추고 있었다.


둘째, 피로가 쌓인 관계에는 경고등을 켜야 한다.
한 시간쯤 문서에 집중하고 나서야 늦은 저녁을 먹게 됐다. 찬밥에 김치를 얹으며 문득 떠올랐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도와준 뒤엔 항상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늘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셋째, 자기 보호는 관계를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감정을 허비하지 않고 지키는 일,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줄이는 일, 무리한 행동을 멈추는 일. 이 모든 건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나를 보존하는 방법이 된다. 나를 무너뜨려가며 도와야 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넷째, 거절은 관계를 위한 예의일 수 있다.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아”라는 말은 싸움의 신호가 아니라 정직한 소통이다. 자신의 여유와 상태를 먼저 점검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만들 수 있다. 감정은 여유 속에서만 온전하게 전달된다.


다섯째, 가까운 관계일수록 명확한 태도가 필요하다.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곧 자기 존중의 표현이다. 무리하지 않는 거절은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습관이 된다. 어떤 사이든 그 적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관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좋은 관계는 서로를 지켜주는 기술이다


지인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위로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야.”


대신,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의 침묵이 가장 큰 위로였다고 했다. 말보다 먼저 전해진 다정함. 마음을 지키는 방식은 그럴 수도 있다.


좋은 관계는 말이 많지 않다. 묻지 않아도 기다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보려 한다. 상대의 속도를 존중하며 다가서지 않는다. 배려는 감정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진심은 시선에 담겨 있고, 지지는 응답이 아니라 기다림에 있다. 감정을 다룬다는 건 행위 이상의 태도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순간도 있다.


관계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 유지된다. 어떤 관계는 더 많은 말보다 더 깊은 주의로 이어진다.


– 관계를 위한 문장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은 조심스럽게 건네야 한다. 친밀함은 배려의 다른 이름이다.


경계는 벽이 아니다. 마음을 지켜주는 울타리다. 경계를 세우고 존중할 때, 관계는 단단해진다.


감정은 말보다 먼저 반응한다. 고요함의 온도는 무시할 수 없다. 침묵 속 지지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내가 지켜야 할 말을 먼저 고민한다. 조언보다는 존중의 언어가 필요하다.

다정함은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율성을 지키는 방식이 곧 다정함이다.


관계를 맺는 길

사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흔들리며, 자신을 확인한다. 그 중심엔 나를 지키는 일이 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타인을 배려하기 어렵다.


좋은 관계는 서로를 지켜주는 연습의 결과다. 감정의 선을 지키고, 변화에 귀 기울이고, 불필요한 개입을 줄이는 태도. 이것들이 관계를 오래 지속시킨다.


거리를 감지하고, 울타리를 존중하며, 자기 마음에 솔직한 하루를 살아가는 일. 그 하루들이 쌓여 관계는 단단해진다.


오늘, 누구의 마음을 조심스레 다뤘는가.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은 잘 지켜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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