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 그 사람을 떠올리면, 내 마음이 단정해진다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도, 그 사람의 분위기만으로 마음 안쪽이 정리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이 흔들릴 때, 복잡한 감정이 고개를 들 때, 그의 태도는 나를 본래 자리로 이끈다.
마음이 정돈된다는 건 흐트러졌던 감정과 생각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흔들림이 잠잠해지고, 시야는 투명하게 맑아진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내 안의 소음은 사라지고 조용한 질서가 자리 잡는다. 외부의 개입 없이 내면 깊숙한 흐름이 변화하고, 감정의 물결은 점차 잦아든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조언을 건네지도 않았고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을 때면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르치려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는 늘 한결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살아냈다. 그 태도는 설명보다 뚜렷했다. 말의 온기보다 눈빛의 깊이가, 직접적인 말보다 행동의 흐름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태도는 말보다 빠르게 전해지고, 더 오래 남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형상이며,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자 타인을 대하는 기본의 깊이였다. 그의 태도는 하나의 언어였다. 조용하고 단단했으며, 흔들림 없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나는 삶의 속도를 조금씩 조절하게 되었다.
그는 침묵 속에서도 존중을 전할 줄 알았다. 말의 시작보다, 마지막 눈빛이 더 부드러웠다. 자신의 템포를 강요하지 않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와 마주 앉아 있으면, 내 안에서 말이 점점 줄었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생각이 조용히 정리되었고, 판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런 침묵 안에서 나의 중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대화보다 존재로 채워졌다.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았고, 그 정적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표현보다 머무름이 앞섰고, 입을 열기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전했다. 나의 말이 줄어든 것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받는 감각은 때때로 아무 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해명이나 정당화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감정이 고조될 때조차, 그의 존재는 나의 진폭을 낮추어 부드러운 흐름을 이끌었다. 억지로 중심을 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균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감정이 밀려드는 순간이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심한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작은 오해가 깊은 틈을 만든다. 그러한 순간마다 나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면 감정의 흐름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애써 참는 것도, 상황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지닌 방식이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었고, 그 감각이 내 마음을 천천히 되살렸다.
며칠 전,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던 중 낯선 이의 거친 말투에 마음이 조금 상했다. 별일 아닌 듯 넘기려 했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하루 내내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요하게 정돈된 자세, 흔들림 없는 눈빛이 생각 속에서 되살아났다. 어떤 설명도 없이 중심을 지켜내던 그의 모습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억지로 억누르지 않아도, 그의 방식이 나를 천천히 안정시켰다. 익숙한 음악이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듯, 그의 분위기는 내 안의 흐름을 다시 잡아주었다.
그는 말보다 태도로 많은 것을 전했다.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고 성찰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로 설득하지 않아도, 그의 일관된 태도는 더 깊은 신뢰를 만들어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빠르게 반응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시선, 즉답보다 여백을 남기는 태도가 마음을 정갈하게 했다.
일관된 태도는 말의 부족함을 채우고 감정의 요동을 감춘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 안정감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확고한 신뢰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내게 믿음이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꾸준히 같은 자세를 지켜온 그의 모습은 말보다 강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나는 배웠다. 도움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기대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자리는 언제나 분명했다. 그런 이와 함께 있을 때, 사람은 이론보다 감각을 먼저 익힌다. 존재의 깊이란 결국 말이 아닌 시간과 태도로 쌓여가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지혜는 리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특정 장면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한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그의 방식은 내 안에 남아 일상의 선택을 조율한다. 그가 남긴 것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삶의 구조였다. 그 방식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함께했던 순간들은 특별한 사건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조용한 대화, 함께 걷던 오후, 조심스럽게 건넨 손길이 내 삶의 결을 다듬어주었다.
닮아간다는 건 반복된 감응에서 비롯된다. 따라 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 닮으려 애쓴 적도 없다. 그의 고요한 움직임과 정제된 말투는 어느덧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나의 거울이 되어, 어떤 삶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보여주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내게 남긴 것은 기억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은 사라지지만, 존재의 결은 남는다. 그의 태도는 나의 말투에 녹아들었고,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며, 관계의 감각을 길러주었다. 어느새 나는 그를 닮아갔고, 이제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삶의 방식은 태도의 연장이자, 조용한 유산이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닌 리듬은 내 삶 속에 살아 있다. 그 고요한 흐름은 나를 부드럽게 이끌고, 지금도 나의 내면을 다듬는다.
진정한 어울림은 감정을 안정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말하지 않아도 존재의 결이 공간에 배어든다. 그런 기운은 마음의 흐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중심을 드러내게 한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타인을 탓하던 내가 이제는 한 템포 쉬어간다. 감정의 소모를 줄이게 되었고,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자극적인 만남보다는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관계를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 사람과의 만남은 내 삶의 방향을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이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고, 나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 말로 설명하기보다 살아내는 삶, 가르치기보다 보여주는 태도로 존재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며 명상으로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본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하고, 조용한 리듬을 지켜나간다. 내 존재가 언어가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지금도 가끔 그를 떠올린다. 지치고 예민한 날, 판단이 흐려지는 순간마다 그의 시선과 손끝의 움직임이 떠오른다. 그 기억은 나를 다듬는다. 말이 줄고, 생각이 가라앉으며, 중심이 다시 세워진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다시 단정해진다. 그것은 그의 언행이 남긴 조용한 이정표이자, 살아낸 방식이 전한 깊은 영향이다. 존재는 어느 순간 문장이 되고, 다른 사람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 울림이 내게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조용히 정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