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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36편 - 쓰고 지우는 동안, 내가 완성된다

by 정성균

창문을 반쯤 연 채 책상 앞에 앉았다. 8월 중순, 늦여름의 습기 머금은 바람이 느리게 스며든다. 멀리 손질이 잘 된 고급 아파트의 정원수(庭園樹)는 짙은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밤사이 내린 이슬을 머금은 풀잎에서 옅은 흙 냄새가 올라온다. 손끝에 닿는 거친 종이결, 검은 잉크의 냄새가 적막을 채운다.


책상 위엔 원고 한 장이 놓여 있다. 문장들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얽혀 있고, 어떤 단어는 서로 부딪치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하다. 이야기는 분명 살아 있으나, 새벽의 그림자처럼 빽빽하고 어둡다. 그러나 지금은 밤의 눅진한 기운에 눌려, 포개진 잎 사이 깊숙이 가라앉아 그 미묘한 결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빛나는 한 줄은 분명 있을 것이다.


덜어내는 순간, 본질이 남는다


펜을 들었다. 첫 문장을 오래 바라보는 행위는 명상과도 같다. 글을 다듬는 일은 표현을 매끄럽게 하는 기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차가운 돌덩이를 깎아 그 안에 숨겨진 본래의 형상을 찾아가는 조각가의 고독한 의식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남겨진 뼈대 속에서 글의 진짜 심지가 드러난다. 무언가를 지우는 행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목적은 본질을 남기는 것이다.


어지러운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내 안에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위. 우리는 글을 다듬으며 우리 삶에 씌워진 수많은 관계와 역할의 껍데기를 걷어낸다. 그리고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진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의 삶은 지금 어떤 문장들로 쓰여지고 있는가?


한 단어를 바꾸자 문장 전체의 온도가 미묘하게 변한다. 의미는 그대로인데, 전해지는 감정의 색깔이 달라졌다. 탁한 물의 흐름이 잦아들자, 맑은 물 위로 진짜 색이 드러난다. 흐릿한 거울을 천천히 닦아내듯, 글의 내면 풍경이 또렷해진다. 그 순간, 글이 숨기고 있던 목소리가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다. 본질은 늘 군더더기 속에 숨어 있다. 덜어낸 만큼 깊은 얼굴이 나타나고, 그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은 언제나 작가 자신이다. 당신의 글은 지금 어떤 온도를 품고 있나요? 글의 표정은 작가 내면의 가장 솔직한 표정이기에, 그 표정을 찾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질서를 세우는 손길


문장은 생각의 순서와 마음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 문단과 문단 사이의 길목이 정돈되면, 독자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은 하나의 걷고 싶은 길이 된다. 이 과정은 음악가가 악보에서 불필요한 음을 빼고, 적재적소에 쉼표를 넣는 행위와 같다. 글이 읽히는 속도와 숨의 간격이 맞아떨어질 때, 독자는 안심하고 글 속에 온전히 머문다. 질서를 부여하는 손길은 글에 리듬감을 불어넣고, 독자를 부드럽게 이끈다. 이 힘은 기술적 완성이 아닌, 글을 통해 마음과 마음을 잇고자 하는 진심에서 비롯된다. 질서 있는 글은 작가의 사려 깊은 마음이 빚어낸 아름다운 건축물과 같다.


글쓰기에서 질서를 세운다는 것은 문법이나 논리적 흐름의 규칙을 좇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의 인지적 부담을 최소화하고, 그들이 글 속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돕는 배려이다. 잘 정돈된 정원이 방문객에게 편안함을 주듯, 질서 있는 글은 독자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러한 안정감 속에서 독자는 글의 깊은 의미를 탐색할 여유를 갖게 된다. 글의 질서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무언의 약속이며, 신뢰의 기반이 된다. 이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독자의 마음에 닿기 어렵다.


시간이 만드는 깊이


퇴고는 한 번에 끝나지 않는 고독한 여정이다. 오늘 다듬은 문장을 며칠 후에 다시 읽으면, 어제는 보이지 않던 틈이나 어색한 표현이 드러난다. 시간은 글 속에 침전물을 남기고, 그 속에서 불필요한 것과 필요한 것을 명확히 구분해 낸다. 시간의 농축은 글에 깊은 향기를 부여한다. 급하게 쓴 문장은 순간적인 빛을 발할지 모르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문장은 반드시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니체는 "깊이 있는 자는 천천히 성장한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의 진정한 성장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글의 깊이와 무게는 쓰는 사람의 호흡과 그 글을 위해 기꺼이 바친 시간에서 나온다. 잘 숙성된 와인처럼, 글 또한 시간의 침묵 속에서 고유의 향과 풍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의 침전물'은 글의 오류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글을 썼던 당시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글을 쓸 때 가졌던 맹목적인 열정이나 과도한 감정에서 한 발 물러서서, 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자신의 글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글은 작가 개인의 기록을 넘어, 보편적인 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확장된다.


관점을 바꾸는 힘


같은 문장이라도 그 위치를 옮기면 전달하는 힘이 달라진다. 앞에 두면 단호한 선언이 되고, 마지막에 두면 깊은 울림이 된다. 이처럼 단순한 위치의 이동이 글의 구조를 바꾸고, 메시지의 결을 섬세하게 변화시킨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이 있다. 그 작은 이동이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퇴고는 문장의 자리를 바꾸는 작업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시선과 관점의 위치를 재배치하는 고도의 훈련이 된다. 글을 다듬으며 우리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게 된다. 화가가 캔버스에서 물러나 그림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처럼.


문장의 위치를 옮기는 것은 사진작가가 같은 피사체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 사물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낸다면, 측면에서 찍은 사진은 그 형태와 그림자를 통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글도 이와 마찬가지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위치에 두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전달되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생각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시도하고, 가장 효과적인 전달 방식을 고민하게 만든다.


윤곽이 드러나는 글


초고 속에는 이미 이야기가 있다. 다만 그 윤곽이 희미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순서를 조정하는 고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의 형태는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작가도 깨닫는다. 이 글은 처음부터 바로 이 얼굴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다만 그 얼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충분한 다듬음과 기다림이 필요했을 뿐이다.


글은 스스로의 형태를 찾아가는 유기체와 같다. 작가는 그저 글이 본래의 모습을 찾도록 돕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장자가 말한 ‘대붕(大鵬)이 바람을 타기 전 고요히 웅크림’처럼, 글 또한 세상에 나아가기 전 내면의 힘을 응축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글쓰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글쓰기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듬는 즐거운 탐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초고는 작가 무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다. 그 안에는 논리적으로 정돈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강력한 생명력이 담겨 있다. 퇴고는 그 원초적인 생명력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면서,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아름다운 형태로 빚어내는 작업이다.


의도를 다시 묻는 시간


마지막 퇴고 단계는 스스로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나는 이 글을 왜 쓰는가?" 그 답이 선명하지 않다면, 아무리 잘 쓴 문장이라도 목적 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단어와 문장이 오직 하나의 분명한 의도를 향해 나아갈 때만, 글은 비로소 강한 흐름을 갖게 된다. 작가의 마음이 명확할수록 문장은 길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음은 독자에게 온전히 가닿아, 글의 여정을 완성시킨다. 의미 정련의 끝에는 글의 투명한 영혼이 담겨 있다.


이 질문은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을 상기시킨다. 진정성 있는 글은 작가의 깊은 사유와 분명한 의도에서 나온다. 이러한 글은 독자에게 정보 이상의 감동과 울림을 제공한다. 독자는 글의 표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의 진실된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의도를 묻는 과정은 글쓰기 행위를 넘어, 우리의 삶에 대한 의미를 묻는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나는 이 삶을 왜 사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왜 보내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질 때, 우리의 하루는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조화와 균형의 완성


모든 다듬기가 끝난 후, 글은 조화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 길게 늘어진 문단에는 공기를 불어넣어 숨통을 트이게 하고, 너무 가벼운 문단에는 단단한 단어를 더해 무게감을 실어준다. 이 균형이 맞을 때 독자는 글 속에 편안하게 오래 머문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무거운 곳은 과감히 내려놓고, 너무 가벼운 곳은 소중히 붙잡아야 한다. 조화 추구의 감각은 결국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지혜로 이어진다. 글을 다듬는 행위는 삶의 무게추를 조절하는 연습과도 같다.


글쓰기에서의 균형은 형식과 내용, 감성과 논리, 보편성과 개성의 조화로운 결합을 의미한다. 감정만 앞선 글은 독자에게 부담을 주고, 논리만 강한 글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 두 요소가 적절히 어우러질 때, 글은 설득력과 감동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러한 균형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습과 사유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과 휴식, 책임과 자유, 관계와 고독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은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글쓰기는 우리가 삶의 균형을 잃었을 때,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조용한 스승이 되어준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순간


다듬기가 끝난 글은 외면과 내면이 일치한다. 겉으로 보이는 문장과 그 속의 깊은 의도가 어긋나지 않고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그 순간, 작가는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글이 나를 닮았고, 내가 글을 닮았음을 확인하는 시간. 헤르만 헤세는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정"이라 했다. 원고를 덮으며 문득 생각한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처럼, 우리의 삶이라는 글에도 맑은 숨을 불어넣는 일이 필요하다고. 우리의 하루에도 다듬어야 할 문장이 있다면, 그것은 말일 수도, 태도일 수도 있다. 글을 다듬듯 삶도 한 번 더 살펴보고 고친다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 더 깊고 아름다워질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는 것처럼, 글을 다듬는 일은 완성을 향한 길이 아니라, 더 깊은 나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당신의 삶이라는 글은 지금 어떤 단어와 문장들로 채워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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