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37편 - 나와의 대화를 위한 자리

by 정성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늦은 여름의 바람이 바다를 건너와 방 안으로 거침없이 들이친다. 낮 동안 세상을 짓눌렀던 뜨거운 열기는 소리 없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선선한 기운은 격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파도에 부서진 소금기가 바람을 타고 온몸을 휘감고, 바닥 가까이에서는 젖은 모래가 뿜어내는 묵직한 짠내가 숨 쉬는 곳마다 맴돈다. 나는 그 압도적인 냄새 속에서 희미해졌던 기억의 편린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펜을 들고 마음을 펼치는 일이 결국 지난 시간들의 얼굴을 불러내는 작업이라면, 그 시작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드는 감각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탁자 위에는 낡은 노트와 펜이 놓여 있다. 나는 어떤 서사를 남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모처럼 바닷가 펜션에 홀로 머물며, 내 안에 숨어 쉬는 가장 깊은 자아와 온전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문장은 그저 대화의 옅은 흔적일 뿐, 글을 쓰는 본래의 목적은 스스로의 실존과 대면하는 일이다. 글은 나에게 기록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대화로 존재한다.


감각의 창

글은 항상 감각의 문턱에서 시작된다. 늦은 여름 바다의 짠내,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손끝에 닿는 종이의 거친 감촉. 이 모든 것이 대화를 이끌어내는 시작점이다. 나는 한 문장을 쓰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인다. 갯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격렬한 감정의 폭발 같다. 반면 고운 모래를 부드럽게 쓸고 가는 파도 소리는 잔잔한 마음의 속삭임이다. 펜을 쥔 손은 마음의 파도를 따라 움직이고, 때로는 거친 문장을 쏟아내기도, 때로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결국 내 안의 현상을 종이 위에 옮겨 담는 일이다.


나는 혼자일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리고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탁자 위 펜은 나를 쓰는 또 하나의 손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하나의 문을 여는 열쇠다. 이 문을 통해 나는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 숨기고 싶었던 감정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여러 명의 내가 된다. 과거의 상처받은 나, 미래를 꿈꾸는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나. 이 파편화된 존재들은 종이 위에서 마침내 만나고,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글은 이 다층적인 자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준다.


비움과 채움의 리듬

글쓰기는 쓰는 행위만큼이나 비우고 지우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수많은 단어들을 썼다가 다시 지운다. 한참을 썼던 문단을 통째로 찢어버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 모든 행위가 실패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알게 되었다. 내가 쓴 문장만큼이나, 내가 지운 문장 또한 나의 일부라는 것을. 지워진 흔적들이야말로 나의 고민과 망설임, 그리고 내면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쓸고 가듯, 나는 수많은 문장들을 지운다. 그리고 파도가 사라진 뒤 남는 고요처럼, 종이 위에는 새로운 여백이 생긴다. 그 빈 공간은 다음 문장을 위한 침묵이다. 채워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때때로 침묵 속에서 빛난다는 것을. 늦은 밤, 창밖의 바다가 모든 소리를 삼킨 것처럼 고요할 때,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아낸다. 그 고요가 나의 글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시간의 지층

돌이켜보면, 수년 동안 나는 짧은 문장들을 꾸준히 적어왔다. 시간이 지나 빛바랜 듯 낡아 보이는 문장도 있었고, 처음의 낯빛 그대로 맑게 남아 있는 글도 있었다. 심지어 완전히 지워버린 흔적들조차 지금의 나를 이루는 무형의 재료로 남았다. 그 모든 기록은 삶을 향해 낸 작은 창문이었고, 그 창문 너머로 나는 비로소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썼던 글들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과 같다. 각 문단에는 그때의 공기,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가끔 오래된 노트를 꺼내든다. 어색한 문장과 서툰 표현들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절실하게 스스로와 대화하려 했는지 알려주는 증표다. 낡은 종이에서 풍기는 희미한 냄새는 지나간 시간을 현재로 불러온다. 그 냄새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건드리면, 나는 다시 한번 그때의 나를 품어 안는다. 글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되어준다.


타인과의 연결

글은 혼자만의 대화로 시작되지만, 그 사적인 웅덩이에서 퍼져나간 작은 파문은 결국 낯선 해변에 닿는다. 내가 노트에 새긴 고백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닿아 조용히 퍼져나간다. "그 문장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라는 독자의 한마디는, 나의 가장 외로운 발걸음이 누군가의 길 위에서 작은 위안이 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글은 세상의 소란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별빛과 같다. 화려한 외침은 바람에 흩어져도, 진솔한 이야기는 긴 잔향을 남긴다. 오래된 책갈피에서 나는 향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문장이 결국 남아, 누군가의 삶에 긴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글이 지닌 가장 큰 힘이다. 나는 이제 내가 쓴 글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의 이야기는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삶들을 만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한한 여정의 시작점일 뿐이다.


삶의 좌표

이 자리에 굳이 앉는 이유는 어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스스로의 삶을 단단하게 다지는 정직한 행위다. 원고는 결과물이 아니라 매 순간의 과정이며, 기록은 성취가 아니라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다. 글은 아직 책이 되기 전부터 나의 삶과 내면을 조용히 일깨워 놓는다. 나는 여기 앉아 바다의 냄새를 마시며, 가장 나다웠던 순간들과 지금의 내가 대면하는 시간을 경험한다.

글쓰기는 나를 세상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닻이다. 펜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다의 파도 리듬이 일정하게 밀려오는 것처럼, 글을 쓰는 호흡은 꾸준히 반복되며 나의 무너진 마음을 조금씩 일으켜 세운다. 밤바다의 고요 속에서 나는 삶의 방향성을 다시금 확인한다. 나의 글이 어디로 흘러갈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글은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길을 걷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준다.


종이 위의 삶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무수한 메모들을 그러모으며,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시간의 강물로 합쳐지는 것을 느낀다. 한때는 단 한 문장도 되지 못했던 찰나의 감정들, 갈 곳을 잃었던 생각의 편린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이 노트와 저 노트에 흩어져 있던 글들은 마치 잃어버린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과정은 나에게 글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내 삶의 가장 깊은 파편들을 정돈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행위임을 깨닫게 했다.


언젠가 나의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를. 그 책은 화려한 겉모습이나 두께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 안에 새겨진 진솔한 마음으로 존재할 것이다. 페이지마다 남겨진 나의 목소리는 활자가 되어 독자에게 스며들고, 그 순간 내 삶의 파편들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낯선 서가에서 그 책을 집어 들고, 조용히 첫 페이지를 펼치는 누군가를 상상한다. 그가 나에게 귀 기울이는 그 짧은 순간, 나의 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된다.


책은 나와 타자 사이를 잇는 다리다. 내가 써 내려온 시간이 한 사람의 읽는 시간과 포개지는 곳. 그곳에서 글은 더 이상 나만의 소유가 아니고, 삶은 비로소 공유되는 세계로 나아간다. 책은 그렇게 한 존재의 흔적에서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된다. 이 모든 것은 한때 노트와 펜 앞에 앉아,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던 나의 작고 나약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 글들이 세상과 만나는 날, 나의 내면의 대화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세상과의 대화로 확장되는 순간을 목도할 것이다.


이제, 내 글의 끝자락에서 당신에게 작은 질문을 건넨다. 당신의 손끝으로 쓴 삶의 문장들은 무엇인가요? 당신만의 고요한 바다에서 스스로와 마주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기록 속에 당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당신의 얼굴이 남아있지 않은가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