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마음을 깨우는 자기 성찰의 심리학
세상에는 무수한 갈래의 길이 있고 저마다의 풍미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질량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려한 미각의 지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마음은 가장 낡고 길든 문지방을 향했다. 결국 끓는 물을 부어, 솥바닥에 눌어붙어 잠든 밥알을 흔들어 깨웠다. 무심한 듯 구수한 향이 비좁은 방 안을 채우자 세상의 소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의 문을 두드리기보다, 이미 익숙해진 잔열 속으로 기꺼이 몸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고요가 내어주는 아늑함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음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온기를 잃어가는 밥알보다 관성에 젖은 마음이 실은 더 빠르게 굳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정지된 평온이 주는 기운은 분명 다정했지만, 그 품 안에서 나의 시간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눌은밥의 미열이 혀끝을 돌아 몸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한때 내 안에 뜨겁게 타오르던 무언가는 도리어 차갑게 잦아들었다. 한 곳에 머무르기로 작정한 순간, 생동하는 기운은 소리 없이 증발해 버린다.
일상에서 걸음이 멈춘다는 것은, 새로운 길 위에서 헤맬 용기를 잃는 일과 같다. 낯선 맛을 향한 호기심을 잊은 혀, 다른 풍경을 향해 내딛기를 망설이는 발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 안에서 어제의 감각만을 되풀이하는 하루는, 오래 닫아둔 방의 공기처럼 존재의 생기를 서서히 잠식시킨다. 그렇게 자신만의 영역에 머물수록, 바깥세상의 빛과 색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멈춰 선 이의 진짜 비극은 행동하지 않는 나태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장이란 열병에 수반되는 고통과 세상의 서늘한 주시(注視)를 감당할 마음의 부재다. 그들은 ‘안전’이라는 낡고 두꺼운 외투를 끝내 벗지 못한 채, 살아있음의 증거인 희미한 체온마저 잃어가며 소중한 시간을 무심히 흘려보낸다.
손가락 하나가 향하는 곳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끝은 늘 바깥의 어딘가를 겨누고 있다. 회의가 늦어진 이유를 교통체증 탓으로 돌리던 날, 내면에는 준비가 부족했음을 아는 자신이 있었다. 잘못 채운 단추의 책임을 단추 구멍에 물었고, 엇갈린 걸음의 원인을 보도블록의 희미한 균열에서 찾았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의 마음 기제로 귀결된다. ‘나와는 무관해’라는 자기 위안은 감미로워서, 잠시 동안은 어깨의 무게를 덜어주는 듯하다.
그 달콤함의 이면에는 좌절에 대한 깊은 주저가 숨 쉬고 있다. 주도권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음 날의 시도 역시 자신의 역량에 달려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핑계라는 보호막 뒤에 숨으면, 실패는 ‘불운한 외부 요인’ 일뿐 자신의 ‘결점’이 되지 않는다. 이 감미로운 착각은 자신과 주변 환경 사이에 투명한 벽을 세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무언가를 붙잡는 대신, 벽 너머 풍경을 원망하는 관객으로 남는 것이다. 실패의 흔적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성향은 결국 자신의 지도를 지워버리는 행위와 같다. 변명의 연무가 내려앉으면, 발목이 먼저 둔해진다. 순간의 평온이 다음 날의 가능성을 좀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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