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1일 새벽 3시.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를 켭니다. 창밖은 한 해를 정리하는 적막으로 가득하고, 제 앞에는 지난 일 년의 궤적이 담긴 하얀 화면이 놓여 있습니다. 에세이스트로서 문장을 빚고 사유를 정제해 온 시간은 하루 평균 두 시간, 일 년이면 730시간에 달합니다.
이 방대한 숫자는 흘러간 세월의 합산이 아닌, 생각이 머물 자리를 찾아 헤매던 치열한 노동의 흔적입니다. 사람들은 작가가 영감에 몸을 맡긴 채 글을 쓴다고 여기지만, 실제의 집필은 엉덩이로 자리를 지키며 문장의 빈틈을 하나씩 봉합해 가는 고독한 싸움에 가깝습니다. 그 격렬한 현장 속에서 매일 아침을 맞이해 왔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유실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본래 휘발되는 속성을 지녔기에, 적어두지 않으면 어제의 배움도 오늘의 결심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습니다. 저에게 기록은 과거를 저장하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지는 삶의 파편을 수집하여 나라는 정체성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가구는 집의 외형을 꾸미는 껍데기일 뿐이지만, 책과 그 속에 새겨진 기록은 삶을 지탱하는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매일 수분을 공급해 준 존재는 제 글을 아껴준 독자 여러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머물 때마다 보잘것없던 제 문장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고 세상 밖으로 줄기를 뻗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뻗어 나가는 줄기를 더 곧고 단단하게 가꾸는 일은 오직 작가의 정직한 공들임으로만 가능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모든 글의 초안을 쓰레기라 단언하며, 완성된 문장이란 집요한 수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임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걸작 『노인과 바다』를 세상에 내놓기 전까지 수백 번의 개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저 역시 매일 마주하는 제 글들이 처음부터 온전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독자의 사랑으로 얻은 생명력을 한 줄의 진실한 문장으로 갈무리하기 위해, 오늘도 저는 거친 초안을 깎아내고 다시 세우는 고요한 분투를 이어갑니다.
거친 문장을 깎아내고 불필요한 수사를 덜어내며, 비로소 진실에 가까운 한 줄을 찾아낼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에세이스트의 특권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발견하는 추함과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일입니다.
원고를 통째로 삭제해 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파일 오류로 몇 시간의 노동이 증발했을 때, 화면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기생하지 않고도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이 한 줄을 붙잡기 위해 보낸 새벽이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손끝에서 빠져나간 문장들이 제 삶의 일부를 함께 데려간 듯한 공허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4시, 어김없이 스탠드를 켰을 때 깨달았습니다. 빈 문서를 다시 채우기 위해 첫 줄을 고르는 행위는 습관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록을 멈추는 순간 제 하루가 무너진다는 것을 삭제된 원고 한 편이 또렷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상실은 때로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가장 명확하게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행간을 채우는 성실은 내면의 지평을 확장해 실질적인 삶의 기반을 설계합니다. 경쟁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문장은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가치 창출의 통로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업무 메일의 정교한 문장 하나가 협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생각의 뼈대가 선명하게 드러난 제안서는 신뢰를 자본으로 치환합니다.
광고 문구의 서두와 제안서의 목차 문장이 매출 곡선을 움직이고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장면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력서에서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음 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듯, 문장은 조용히 돈과 기회의 흐름을 설계합니다. 쓰지 않는 사람은 현상에 쫓기지만, 기록하는 사람은 흐름을 설계하며 그 속에서 안정적인 삶의 영토를 확보합니다.
기록의 윤리는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이러한 성실한 반복으로 입증됩니다. 문장을 다루는 방식은 인식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삶의 기반을 설계합니다. 경쟁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문장은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가치 창출의 통로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업무 메일의 정교한 문장 하나가 협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인식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 제안서는 신뢰를 자본으로 치환합니다.
실질적인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문장을 지켜낸 그 순간, 저는 비로소 기록하는 사람으로서의 주도권을 확보했습니다. 윤리는 말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으로 증명될 때 비로소 힘을 얻습니다. 저는 그 손해를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제 문장의 주인으로 남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 년간 저는 두 가지 형식의 기록을 병행하며 창작의 폭을 확장해 왔습니다. 브런치에서는 인간 내면의 심연을 파고드는 깊은 사유의 에세이를 매일 적어 내려갔습니다. 복합적인 감정의 타래를 정밀한 언어로 풀어내며 사유의 지층을 쌓는 과정은 제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어 문맥의 빈칸을 채우는 그 고요한 환희는 제 삶을 지탱하는 실질적인 힘이었습니다.
동시에 스레드에서는 복잡한 담론을 명료하게 요약한 통찰을 나누거나 제 삶의 자양분이 된 책들을 소개하며 세상과 더 빠르고 넓게 소통했습니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저를 더 나은 관찰자로 만들었고, 제 세상은 이전보다 더 넓고 깊어졌습니다.
제 글 아래 달린 반응 중 지친 퇴근길에 제 글 한 줄을 읽고 나서야 마음의 빗장을 풀 수 있었다는 어느 독자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사실 그 메시지를 만났던 날 밤, 저는 무거운 자괴감에 빠져 연재를 중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문장이 제 오늘을 행복하게 했습니다"라는 짧은 한 줄이 제 새벽 원고를 폐기하지 않도록 저를 붙들었습니다. 독자의 시선은 제게 통계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반응은 작가로서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실존적 응답입니다. 여러분의 공감은 매일 아침 빈 화면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을 견디게 한 유일한 동력이었습니다. 일일이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송구함을 이 글로 대신하며, 한 분 한 분이 제 문장의 소중한 수신인임을 밝힙니다.
이제 우리는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마주합니다. 60년 만에 돌아오는 붉은 말의 해가 상징하는 불(火)의 기운과 역동적인 기상은 정체된 것들을 태워버리고 목표를 향해 주저 없이 내닫는 추진력을 뜻합니다.
저는 이 기운을 빌려, 내년에도 안주하지 않는 사유와 더 단단한 기록으로 여러분의 삶에 다가가겠습니다. 기록이 없던 시절의 저는 늘 타인의 언어로 제 하루를 설명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늘 객체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문장으로 제 세계를 정의합니다. 이 대비가 주는 안정감과 주도권은 제가 기록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자산입니다.
올해라는 장부를 덮고 내년이라는 새 페이지를 펼칩니다. 변함없이 저는 내일 새벽 4시에 스탠드를 켤 것입니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깨어 첫 문장을 고르는 그 엄격한 규칙이야말로, 제가 독자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압도하며, 글로 남겨진 시간만이 비로소 우리의 실질적인 자산이 됩니다. 에세이스트로서 제가 느낀 사유의 기쁨과 기록의 실용적 효용이 여러분의 삶에도 실질적인 힘으로 전이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다가올 병오년의 기운을 담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일 년을 관통하는 핵심 사건 하나를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성장의 목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십시오. 기록된 고통은 힘을 잃고, 기록된 소망은 전진하는 동력이 됩니다. 올 한 해 제 삶의 증인이 되어 주시고, 제가 글 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지금 이 글을 닫으며,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문장을 여러분의 내일 앞에 건넵니다.
에세이스트 정성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