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작은 기쁨들

by 정성균

가벼움


원목 책상 모서리의 차갑고 단단한 결이 손바닥에 닿는다. 화면 위 검은 커서는 일정한 박자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눈가를 어른거리고, 자판을 누를 때마다 낱개의 활자들이 손끝을 밀어 올리며 침묵의 균열을 깨뜨린다. 기록하는 기관으로 화한 손마디마다 긴장이 맺힌다.


화면 위에서 손가락이 길을 잃고 방황하던 시간들. 그 끝에서 마침표 하나를 찍지 못해 파일 이름 뒤에 숫자만 붙여가며 저장하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어버린 밤이 있었다.


맺지 못한 말들이 적막 사이를 떠돌 때, 손가락은 빈 허공을 쥐었다 펴며 자판 위를 맴돌던 미련을 털어낸다. 의자를 밀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비누 거품으로 손가락 사이사이 고여 있던 땀과 무력감을 씻어낸다. 수전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오늘의 쓰지 못한 일기를 대신한다.


고요


온기를 잃어가는 찻잔이 책상 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표면을 검지로 가만히 더듬으면, 어깨의 무게가 의자 깊숙이 가라앉고 시야에는 오직 검은 선의 움직임만 남는다. 단 한 문장도 잇지 못한 채 찻잔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의 개수만 세다 자리를 뜨는 밤들.


비어 있는 화면의 백색 광이 눈을 찌를 때, 전원을 꺼버린다. 빛이 빠져나간 자리에 서늘한 적막만 고인다. 책상 모서리에 묻은 작은 얼룩을 손톱 끝으로 긁어낸다. 무미건조한 마찰음이 잦아들 무렵, 정적 속에서 비로소 비워진 자아의 윤곽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사물들이 제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과 같다. 찻잔을 헹구며 그 맑아진 표면 위로 정직한 단어들을 기다린다.


살아있음


연필 끝이 종이의 거친 결을 긁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무른 심이 뭉그러지며 남긴 흑연 가루가 종이 위에 번지고, 이내 손가락 마디마다 검게 묻어난다. 그 서늘한 얼룩을 타고 흐릿했던 형체가 선명한 선으로 그어진다. 종이 위를 구르는 것은 가루가 아니라, 저항하는 매체 위에 나를 각인시키려는 처절한 마찰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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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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