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과 호의가 순환하며 만드는 삶의 무늬

by 정성균

마음이 조심스러워지는 시간


코끝과 귀 끝이 아릴 만큼 온도가 떨어진 초저녁, 아파트 단지 보도블록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로비 입구에 멈춰 서서 손끝에 닿는 차가운 번호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누르면, 가벼운 신호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문이 옆으로 열리기 마련이다. 실내 공기가 얼굴에 닿는 느낌을 받으며 우편함이 길게 늘어선 벽면을 지나 승강기 버튼을 누른다. 위층에 머물던 승강기 위치를 알리는 숫자가 빨간색으로 점멸하며 차례로 바뀌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그사이 손에 쥔 가방 끈을 고쳐 잡는다. 스테인리스 문에 희미하게 비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닥 매트 끝에 신발을 문지르며 밖에서 묻어온 먼지를 털어내기도 한다.


잠시 멈춰 기다리는 동안 낮에 만난 사람들의 표정과 대화 내용이 조용히 떠오르는 법이다. 이름을 미처 부르지 못했던 이들의 모습까지 선명하게 생각나는 그런 시간. 그럴 때마다 그날 건네지 못한 인사 하나까지 다시금 다시금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되짚어보게 된다. 인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하루의 끝에 남아 있다가, 적막한 복도 공기 속에서 비로소 살아난다. 멀리서 닫히는 어느 집 현관 소리와 엘리베이터가 각 층을 지날 때 내는 낮은 기계음은 이런 생각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계산 없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의심 없이 믿으며 떠오르는 말을 바로 전하곤 했다. 하지만 몇 차례 마음이 어긋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아주 작은 행동 앞에서도 망설임이 생긴다. 손을 먼저 내밀었다가 어색해졌던 일, 정성을 들여 돕고도 소식이 없던 날, 서운함이 남았던 장면들이 기억에 고스란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들은 다음 선택을 해야 할 때 자꾸만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이유가 된다.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을 이렇게 익혀간다. 필요한 말만 전하고 맡은 일만 처리하며, 더 가까워질 기회가 보여도 잠시 멈춰 선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줄고 감정의 흔들림도 적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르면 변화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주변은 조용해지고 연락처의 이름들은 줄어들며, 함께 웃던 시간도 멀어진다.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상처받지 않으려 마음을 닫았던 태도가 생활의 온도까지 낮추고 있었음을.


문을 닫으면 바람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빛 또한 들어오지 못한다. 단 하루 정도라면 혼자만의 힘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나, 긴 인생의 시간을 보내려면 결국 다른 사람의 다정한 손길이 필요하다. 짧은 인사 한마디, 잠시 같이 걷는 일, 아무런 이유 없는 안부가 큰 힘이 되는 때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혼자만의 시간을 아주 오래 보낸 뒤에야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보냈다. 한동안은 그저 성실하게 대하면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누군가의 고민을 인내하며 듣고, 도움을 청하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시간을 내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먼저 소식을 남기고 약속을 챙기며 상대방의 사소한 변화조차 기억하려 애를 썼던 기억들.


하지만 모든 연결이 정성을 쏟은 만큼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래 곁에 남는 사이도 있었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멀어지는 관계도 많았다. 끝까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끝난 일도 있었고, 고맙다는 표현 한마디 없이 흐려진 시간도 많았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은 뒤, 혹시나 해서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켜 보던 밤이 여러 차례 있었다. 화면의 밝기를 조절해 보고, 알림 목록을 끝까지 내려 확인하며, 대화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기를 반복하는 행위. 더 이상 메시지가 오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도, 혹시 기계적인 오류로 늦게 도착하지 않았을까 한 번 더 살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화면 불빛만이 홀로 남아 얼굴을 비추던 장면은 이제 익숙하다. 창틀을 날카롭게 스치는 바람 소리와 멀리 길 위를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만이 귀에 또렷하게 남곤 했다.


이런 경험을 한 뒤로는 앞장서서 호의를 베푸는 일을 줄였다. 그렇게 지내니 겉보기에는 삶이 고요해졌고 하루하루는 큰 일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감정을 소비하는 일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자 다른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줄었지만 삶에서 웃음도 함께 줄어들었고, 부탁을 들어줄 일은 사라졌으나 정작 진심으로 도움을 청할 사람도 함께 사라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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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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