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관계를 지키는 합의

by 정성균

연휴를 준비하는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상 위에 올릴 제사 음식 가짓수를 두고 집집마다 생각이 다르며, 차례를 계속 지낼지를 놓고도 의견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차림을 줄이는 것을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는 집안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예전 방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논의의 중심은 식탁 위 메뉴 숫자가 아니다. 무엇을 덜어내고 남길지 결정하는 실제 기준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잣대가 흔들릴 때 우리는 지켜야 할 대상이 형식인지 사람인지 결정해야 할 갈림길에 선다. 이러한 현실적 깨달음에서 시작해야 명절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모습이 바뀌는 과정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긍이며, 우리가 왜 한자리에 모이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인 셈이다.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해법이 보이기 시작한다.


형식의 축소


설 풍경이 바뀌었다는 양상은 일상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이 통계적으로 크게 늘었으며, 상차림 규모 또한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이러한 흐름은 잠깐의 유행을 넘어 구체적인 사회 형편과 개인의 생활환경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로 풀이된다. 조건이 변하면 선택도 변한다.


물가 상승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재료 값은 연휴 전후로 가파르게 오르며, 특히 과일이나 고기, 생선 등 제사 용품의 가격 폭등은 살림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고향 가는 길의 차비와 선물 비용을 모두 합치면 짧은 기간 쓰는 돈은 예산을 훌쩍 넘기 일쑤다. 벌이가 크게 늘지 않은 상태에서 옛날 규모를 고집하는 일은 경제적 어려움을 부를 뿐이다. 돈 문제가 반복되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며, 그 괴로움은 명절을 기다리는 즐거움 자체를 깎아내게 된다.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전통은 서류상의 행정 절차처럼 딱딱하게 변할 뿐이다. 겉모양은 유지될 수 있으나 가족들의 진심 어린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합의가 없는 관습은 설득력을 잃고 결국 싸움을 낳으며, 이러한 마찰은 가까운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가족 구조 역시 크게 변모했다. 혼자 사는 가구가 흔해졌고 맞벌이 부부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식구들이 지역별로 흩어져 살면서 이동에는 많은 시간과 힘이 들어간다. 쉬는 날이 짧을 경우 이동은 고립과 피로를 부르기 마련이다. 도착해서 이어지는 힘든 노동은 쉴 시간을 없애고 만다. 휴식이 없는 만남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선택을 넘어선 억지 책무가 된다. 의무감은 껍데기를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 인연을 밀도 있게 만들지 못한다. 연결이 헐거워지면 서로의 삶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가친척의 만남은 기계적인 반복에서 벗어나 구성원들이 납득하는 합리적 판단 위에서 이어져야 한다. 판단이 이치에 맞지 않을 때 틈이 생긴다. 그 틈은 외로움을 부르게 된다.


준비 과정의 집안일 배분 또한 살펴볼 대상이다. 음식 놓는 방향이나 위치 기준은 오랫동안 정해진 규칙을 따랐다. 재료 사기부터 요리, 뒷정리까지 이어지는 일은 노동 강도가 매우 높다. 문제는 이 노력이 화목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 사람에게만 몰리는 구조에 있다. 역할이 고정되면 책임도 불평등하게 나눠진다. 불공평한 틀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화가 쌓이기 마련이다. 원망은 스스로 돕고 싶은 마음을 방해하고 의례를 습관이나 눈치에 기대게 만든다. 생명력을 잃은 관습은 사라진다. 원인은 구조에 있다. 이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많은 가정이 방식을 조율하고 있다. 일부 품목은 사서 올리고 꼭 필요한 것만 마련하기도 한다. 차례를 지내지 않고 밥만 같이 먹는 경우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것은 환경에 맞춘 선택이다. 의례는 식구들의 결속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수단이 목적보다 커질 때 본래 뜻은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절차를 지키느라 힘을 다 쓰는 동안 우리가 왜 한자리에 있는가라는 근본 이유를 잊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으면 겉치레는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과거의 방식이 효도나 정성으로만 풀이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효율성과 유지 가능성이 집단의 새로운 지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제사상의 모양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화목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제사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것을 넘어, 연휴 자체를 휴식이나 여행으로 대신하는 현상으로 넓어지는 중이다. 인연을 잇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관습은 멈춰있는 돌덩이가 아니라 시대와 함께 숨 쉬며 변하는 생명체여야 한다. 변화를 거부하면 스스로를 가둘 뿐이며, 갇힌 전통은 다음 세대를 설득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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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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