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아득한 길을 건너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을 마주하며 지낸다. 일상에서 오가는 수많은 소리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흩어지지만, 어떤 문장은 삶의 한복판에 조용히 가라앉아 오래 머문다. 기억은 일어난 일의 전체 모습보다 그 순간에 들었던 한 줄의 글귀를 더 오래 붙든다. 그 짧은 문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 한 줄이 조용히 중심을 잡아 주고, 사람은 그 문장을 붙잡은 채 다음 날로 걸어간다. 그제야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분명해진다.
명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 무엇을 입을지보다 어떤 첫마디를 건넬지가 먼저 마음을 두드린다. 인사는 짧게 끝이 나지만, 그 뒤에 남는 한마디는 계절을 건너 다음 명절이 올 때까지 마음에 머문다. 대화의 무게는 말을 꺼내는 순간보다 그 말을 고르기 위해 멈추어 서 있던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된다. 찻잔 속에 가만히 가라앉는 찻잎의 움직임처럼 입술을 떠난 문장은 듣는 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다시 쓰인다. 그래서 고향 길에 오르는 사람들은 무엇을 더 말할지를 생각하기보다 어떤 말을 남겨 두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한다. 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오후의 햇살이 비껴가고, 마음이 깊을수록 설명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아차린다.
마당 한쪽 끝에 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짐을 챙기던 나를 어머니가 불러 세우셨다. 명절 준비로 차가운 물속에 손을 오래 담가 두었던 탓인지 어머니의 손마디는 평소보다 더 불어 있었다. 거칠어진 손등에는 지난 시간의 노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문 땅처럼 갈라진 손등의 살갗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가 내 어깨를 가만히 짚었을 때, 손가락 끝에 묻어 있던 서늘한 물기가 옷감을 타고 살갗에 스며들었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분명하게 남았다. 어머니는 지난 일 년의 일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캐묻지 않으셨다. 그저 내 어깨를 짚은 채 잠시 서 계실 뿐이었다. 그 짧은 동안 우리 사이에는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마당의 소란뿐이었으나, 그 어떤 대화보다 꽉 찬 알아차림이 오갔다. 나는 말없이 그 손길을 받아냈다.
“몸만 괜찮으면 된다.”
어머니는 그 뒤에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으셨다. 다독이던 손길 뒤로 더 이상의 물음표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당 담장 너머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나 역시 곧바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때는 그 말이 너무 평범해서 오래 남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이야기는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오직 그 한마디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또렷해졌다. 시간이 또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요구도 기대도 판단도 없었다. 오로지 내가 무사히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만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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