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은 설명 없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 날 돌아보면 이미 삶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겨울 끝자락의 들판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얼어붙어 있던 대지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녹아내린 자리마다 젖은 흙의 살결이 드러난다. 공기에는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지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굳어 있던 층이 풀리며 단단했던 토양의 조직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고요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계절이 이미 방향을 틀고 있다. 사람의 눈에는 정적처럼 보일 뿐이지만, 대지는 스스로 내부를 열며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바람을 따라 떠돌던 씨앗들이 들판 위로 내려앉는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뿌리를 내릴 틈을 찾지 못한 채 마르거나 다시 바람에 밀려 흩어진다. 그러나 풀린 토양을 만난 씨앗은 조용히 몸을 낮춘다. 땅의 온기를 받아들이며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씨앗은 어둠 속에서 길을 낸다. 가느다란 뿌리가 아래로 스며들며 토양이 머금은 냉기와 온기를 차례로 받아들인다. 흙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씨앗은 서서히 자리 잡고, 대지는 그 생명을 다시 품어 안는다.
사람 사이의 인연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공기를 마시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이름조차 흐릿해진 사람들이 길 위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우연 가운데 어떤 이는 기억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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