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를 읽다가, 초반부에서 성공한 작가 로이와 화자인 '나'가 만나는 장면을 마주하면서 미묘한 침묵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피커딜리에 도착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을 흔들었지만 평소의 유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만남이 실망스러운 듯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내게서 무엇을 원했든 나는 그것을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리츠 호텔 아케이드 밑을 지나 공원 난간을 따라 걸어서 하프문 스트리트 반대편에 도달할 때까지 내 태도가 평소보다 지나치게 퉁명스러웠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로이는 내게 부탁할 말을 꺼낼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케이크와 맥주>, 서머싯 몸
이 단락을 읽으며 문득,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말을 절제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가볍게 던진 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기 때문일까. 주변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살피고, 그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며 말을 아끼는 모습은 감정에 솔직한 우리의 삶과는 달랐다. 소설 속 내용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처신하는지에 대한 미묘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책 속 인물들은 이토록 신중한데,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특별히 잘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굳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평소 나는 내 이야기는 잘하지 않는 편이다. 대부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현재 사회 현상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가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불평을 쏟아내곤 한다. 그것이 본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기에, 나는 나에 관한 사적인 서사를 되도록 자제해 왔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참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종종 입을 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이야기조차 나의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타인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없으며, 주의 깊게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그토록 설명하려 애썼을까.
서머싯 몸의 문장을 보며 내가 참 어리석었음을 느꼈다. 작가의 글처럼 그저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며 살면 그만인 것을 굳이 누군가의 인정이나 공감을 얻으려 내가 추구하는 바를 떠벌릴 필요는 없다는 걸 <케이크와 맥주>를 통해 다시금 되새긴다.
지난 금요일, 가장 오래된 친구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동안 친구가 모르고 있던 나의 근황을 조금 털어놓았다. 친구는 내가 그동안 힘들게 살았던 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괜찮다"는 나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떻게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작년에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작은 일을 하는데, 생활은 어떻게 유지되는지, 친구의 걱정 어린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래전부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작은 돈이 생기면 허투루 쓰지 않고 형편에 맞는 투자를 조금씩 해두었고, 그냥 묵묵히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그동안은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이 쌓여 최근에는 제법 괜찮아졌다고 이야기했다. 수익이나 손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당장 쓸 돈이 아니기에 계속 보유했던 것이 어느새 티끌이 태산이 되었다고.
친구는 30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했고, 퇴직 후에도 연금이 보장된 삶을 살 것이다. 젊은 시절 나보다 훨씬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고 노후 걱정도 없는 친구다. 하지만, 나의 변화된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안정을 찾은 나를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큰돈 들어갈 악재가 없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친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듯했다. 결코 시기나 질투를 할 친구는 아니지만, 그녀의 힘없는 표정을 보며 " 아,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가 나를 조금 걱정하는 것 같아 한 말이었는데, 도리어 친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 즐거웠지만, 끝내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책 속의 문장을 곱씹으며 이틀 전 나의 행동을 되돌아본다.
"귀는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 순간을 내가 놓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