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여행
쿠알라룸푸르의 밤은 화려했다.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의 활기로 도시 전체가 반짝였다. 새벽부터 서둘러 공항으로 향해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터라,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리니, 그제야 오늘 하루의 피로와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기엔 창밖의 불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배고픔도 달랠 겸 서둘러 호텔 밖으로 나섰다.
부킷 빈땅 중심가에는 밤을 낮처럼 밝히는 대형 LED전광판 아래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화려한 순간을 기록하려는 듯,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사거리 한편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노랫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낯선 도심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멜로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뒤섞인 이곳, 이 시간에 나 역시 함께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충만함을 안겨주었다. 늘 머물던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처음 딛는 장소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는 기분, 마치 내가 이 거대한 그림 속의 작은 재료가 된 듯한 낯선 소속감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로컬식당인 'Mee Tarik Muslim'으로 향했다. 현지인과 여행객이 적당히 섞여 빈자리를 채우고 있어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히잡을 두른 직원이 건넨 메뉴판에는 1번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엄청난 수의 요리가 빼곡해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럴 땐 역시 시그니쳐 메뉴가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대표 메뉴라는 소고기 조림 국수(Braised beef with sliced noodles)와 파인애플 볶음밥, 그리고 한국의 호떡을 닮은 음식을 주문했다. 곧이어 나온 국수는 묘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싱가포르의 송파바쿠테 국물 같기도 하고, 베트남 쌀국수 육수와도 결이 비슷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놀라운 맛은 아니었지만, 아는 맛이라 오히려 거부감 없이 편안했다. 허기가 반찬이었던 터라 주문한 음식을 깨끗이 비워내고 식당을 나섰다. 이 식당은 무슬림식당이라 그런지, 메뉴판 어디에도 술은 보이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어 근처 편의점에 들렀지만, 말레이시아의 세븐일레븐은 밤 9시 이후 주류 판매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의 문화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문득 태국 치앙마이에서 겪었던 비슷한 규제가 떠올랐다. 나라마다 다른 삶의 방식을 이렇게 또 하나 배워간다. 내일부터 시작될 진짜 쿠알라룸푸르 여정을 위해 오늘은 이쯤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이튿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였다. 이번 여행에는 특별한 목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쌍둥이 빌딩 앞 수리아 KLCC 4층에 있는 키노쿠니야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작가의 영어 원서를 사는 것. 서점에서 고른 책 한 권을 품고 발리로 넘어가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는 상상. 그것이 내가 계획한 이번 여행의 로망이었다.
그동안 여러 군데 여행을 다녔지만, 여행지에서 일부러 서점을 찾아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조금 다르게 일정을 계획했다. 발리는 이미 작년에 두 번이나 다녀왔고 이번에도 같은 곳에 머물 예정이기에, 단순히 명소를 찍고 돌아다니는 관광이 아니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나의 삶을 새롭게 채워가는 과정이기에 나만의 특별한 매개체가 필요했다. 낯선 도시의 서점을 둘러보고 기록을 남기는 일은 훗날 나만의 브랜드를 기획하기 위한 소중한 영감이 되어줄 테니까. 그렇게 도착한 키노쿠니야 서점에서 방대한 영어 소설들을 하나씩 구경하며 가격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가격표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평소 영어 원서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첫 구매의 기준은 명확했다. '비교적 저렴하고 읽기 쉬울 것'.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다 선택한 책은 놀랍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였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를 워낙 좋아해 즐겨 읽었기에, 특유의 문체가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었을지 호기심도 일었다. 말레이시아까지 와서 영어 원서를 사겠다며 고른 게 하필 일본 작가의 번역본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황당했지만, 끝까지 완독 하려면 역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이 낫겠다는 핑계로 합리화하며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가장 저렴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영어 원서를 읽는 나의 모습. 이것이 진정한 독서에 대한 갈망인지, 아니면 그럴싸한 분위기를 내고 싶은 약간의 허세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랴. 지금의 나에겐 즐거운 영어 공부라는 훌륭한 명분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