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숙소는 정말 그 여행지의 첫인상이었다

가성비라는 핑계로 나의 불편함을 타협하지 않기로 했다.

by 스칼렛

이번 발리 여행의 마지막 장소는 사누르(Sanur)였다. 발리만 세 번째지만, 사누르는 처음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편한 지역을 찾다가 작년에 머물렀던 꾸따 대신 선택한 곳이다. 여행의 마지막 2박을 보내고 공항으로 이동하기에 위치상 제격이었다.


길리에서 출항하는 날 아침, 바다는 잔잔했다. 배에 오르기 한 시간 전 멀미약 안티모(Antimo)를 먹어둔 덕에, 배가 출발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져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나 빠당바이 항구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한 택시로 짐을 옮기고 사누르로 향했다. 항구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택시 기사들은 호객 행위에 여념이 없었다. 궂은 날씨에도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는 그들의 치열함은 세계 어느 곳이나 똑같았다.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구나.


빠당바이에서 사누르까지는 한 시간이 걸렸다. 빗속을 뚫고 달리는 사이 어느새 비는 그쳤다. 뜨거운 태양이 구름을 밀어내며 다시 땅 위로 눈부신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누르 숙소는 처음 예약할 때, 길리 왕복 여객선과 연계된 셔틀버스를 타는 맥도널드 근처로 예약했다. 작년에 길리에서 꾸따로 넘어갈 때 지정된 장소에 내려 다시 택시를 타야 했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누르 숙소를 검색할 때부터 꾸따보다 오래전에 개발된 지역이라 낡았다는 리뷰가 많았다. 은퇴자들이 많고, 전반적으로 노후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맥도널드 근처라는 조건까지 더해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아이콘 발리 쇼핑몰과 맥도널드 모두 가까운 숙소를 겨우 찾아 예약했다. 구글 평점도 4.5점으로 주변 숙소 중에서는 높은 편이었고 후기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낡았다'는 평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런데 막상 사누르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선 순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열악할 줄은 몰랐다. 숙소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다. 혼자 온 여성, 모녀, 연인, 나 홀로 여행객 등 서양인 투숙객들도 제법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수영장과 썬베드 4개도 갖춰져 있었다.


사누르의 숙소 룸의 바닥과 화장실 상태


문제는 배정된 방이었다. 바닥 타일은 여기저기 깨져 있었고, 어두침침한 페인트 색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건 화장실이었다. 단순히 오래된 것을 넘어 너무 지저분했다. 세면대의 물은 정말 느리게 내려갔다. 샤워 부스 바닥은 타일이 깨져 보수한 듯했는데, 전체를 깔끔하게 마감하지 않고 중앙에만 타일을 덧대어 모서리 쪽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아, 이런 곳에서 발리의 마지막 2박을 보낼 수 있을까? 이럴 순 없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걸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 상태가 어떻게 용납이 되는 거지? 난 정말 싫은데.'


하지만, 당장 방을 빼기엔 이미 지불한 2박 요금이 아까웠다. 일단 하루만 자보자며 스스로를 달랬다. 낮에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잠만 자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남편도 나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꾸따로 넘어갈까?"하고 제안했지만, 내가 하루만 있어 보자며 말렸다.


아이콘 발리에서 보이는 바다

나의 발리 마지막 계획은 숙소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쇼핑하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소 상태는 내 기준을 한참 벗어나, 도저히 그 열악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불쾌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짐만 대충 던져두고 밖으로 나왔다.


발리의 마지막 날은 수영장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맛있는 밥을 먹고 쇼핑하고 커피 한잔 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저녁엔 잠만 자면 되니까'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평점이 높고 인기 있는 와룽을 찾아갔다. 식당 안은 사누르에 대한 정보대로 서양인 은퇴자들로 가득했다. 자국보다 물가가 저렴한 곳에서 여유롭게 노년을 즐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아이콘 발리 쇼핑몰에서 보이는 풍경

이곳은 이번 발리 여행 중 갔건 와룽 중 가격이 가장 저렴했는데, 맛은 최고였다.


'어떻게 이 가격에 양도 적당하고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단골이 많은 듯, 가게 여주인은 새로 들어오는 은퇴자들과 서로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눈다. 상냥하고 친절한 여주인은 지나가다가도 단골들과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그 친철함이 이 식당의 비결이구나 싶었다. 사누르의 숙소는 최악이었지만, 와룽에서의 식사는 대만족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아이콘 발리 쇼핑몰도 꽤 괜찮았다. 2024년 12월에 오픈한 이곳은 들어서는 순간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 쇼핑몰을 연상시켰다. 내부 중앙의 인테리어 모습을 벤치마킹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아이콘 발리 쇼핑몰 내부 중앙의 모습


그런데 지하 1층 인도네시아 기념품 매장이 의외였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쇼핑몰에서 기념품을 저렴하게 팔다니, 미끼 상품 구색을 제대로 갖췄다는 인상을 받았다. 보통 쇼핑몰 내 기념품 코너는 비싸기 마련인데, 이곳은 꾸따의 켄카나 아트마켓(Kencana Art Market)만큼이나 가격이 쌌다. 상품이 아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주변에 가볍게 선물하기 좋은 기념품들을 정말 저렴하게 팔고 있어 마음에 쏙 들었다.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부터, 사롱, 목각 인형, 나무 그릇, 액세서리, 면티셔츠, 먹거리, 마그네틱, 열쇠고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다른 매장은 몰라도 기념품 쇼핑만큼은 아이콘 발리가 제격이었다.


사누르, 아이콘 발리 쇼핑몰


커피를 마시러 간 곳은 '데일리 바게트(Daily Baguette)'라는 카페였는데, 로고와 분위기가 한국 파리바게뜨와 너무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짝퉁인데?' 쇼핑몰 안에 있는 카페라 세금과 서비스 요금 16%가 추가로 붙었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으니 용서한다.


파리바게트와 유사한 로고의 데일리바게트 카페


피로를 씻어주는 커피를 마시며 카페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역시 사누르엔 은퇴자들이 많구나.’


아이콘 발리에서 시간을 보낸 뒤, 점심에 먹었던 와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의 스페셜 메뉴와 빈땅맥주로 사누르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행에서 숙소가 이렇게 중요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동안 발리에서 가성비 좋은 숙소들을 잘 골라 다녀서 나쁜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같은 곳은 정말 처음이었다. 낡은 게 문제가 아니라 침대와 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냄새가 문제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냄새가 역겨워 베개를 치워버리고, 침구 위에 내가 가져온 사롱을 깔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결국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내일 아침 꾸따 호텔로 옮기자. 우리의 발리 여행을 이렇게 마무리할 순 없어"


생각해 보니, 작년 베트남 호이안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넘어간 뒤 묵었던 첫 숙소가 좀 별로였다. 호스트는 너무 상업적이었고, 화장실 구조도 이상했다. 화장실 구조야 참을 수 있다 쳐도, 문제는 방에 비치된 의자였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이 푹 꺼지고 부서진 의자를 손님방에 버젓이 둔 것을 보고 황당했다.


'복도에 멀쩡한 의자도 있던데, 부서진 의자를 그대로 준다고?'


결국 예약한 날짜를 꾹 참고 버틴 뒤 다른 숙소로 옮겼다. 어디로 가냐는 호스트의 물음에는 차마 다른 숙소로 간다고 말하지 못해 다낭으로 돌아간다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택시를 불러주겠다며 끝까지 영업을 하길래 우리가 알아서 가겠다고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의자가 부서져있고, 화장실 구조가 이상했어도, 침구만큼은 깨끗해서 예약한 날짜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사누르의 이 숙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곧바로 꾸따의 호텔을 예약했다. 서둘러 씻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하러 나오자, 호스트가 놀란 눈치로 물었다.


"체크아웃은 내일인데, 왜 벌써 나가요?"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순 없어 그저 웃으며 일정 때문에 간다고 둘러댔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나의 마지막 발리를 이대로 망칠 순 없었다.


'자, 꾸따로 가자!'


꾸따의 호텔, 여전히 관리가 잘되어 있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뽑기를 잘못했구나.' 애초에 돈을 더 썼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우붓에서 머물렀던 곳과 비슷한 가격대로 숙소를 정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우리의 첫 선택은 빗나갔지만, 그렇다고 그 잘못된 선택을 억지로 끌고 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과감히 일정을 변경했고, 지나고 보면 이 또한 여행이 주는 추억이자 경험이다. 삶이 어디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던가.


다행히 금전적인 손실이 크지 않아 계획을 바로 수정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다. 내가 어느 정도의 불편함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 나의 진짜 여행 취향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비싼 리조트를 예약했다면 격지 않았을 일이고, 만약 그 비싼 숙소가 이 모양이었다면 당장 엄청난 컴플레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성비를 택했고, 단지 그 가성비가 내 최소한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한 선택이니, 그것을 번복하고 미련 없이 떠나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이다.


이번 일은 나의 호불호가 한층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다 수용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굳이 큰 불편함을 억지로 감수하며 여행을 이어가기엔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났고, 그러기도 싫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언제든 계획을 수정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게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다가왔다.


여행은 온전히 나의 취향과 선호가 반영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이 편안하고, 내 몸이 고단하지 않은 여행을 지향한다. 비록 엄청난 럭셔리 여행은 아닐지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편안한 여행'으로.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