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을 완벽하게 바꾼 발리의 마지막 날
꾸따로 숙소를 옮겼다.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Soon As It Gets)>의 제목처럼 기분이 좋았다. 사소한 것에 실망하며 굳어졌던 표정이 눈 녹듯 사리지고, 마음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던 그림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을 행복하게 보내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을 들고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수영장에는 서양인 은퇴자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수영을 즐기거나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다. 빈땅 맥주를 마시며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토록 여유롭고 자유로운 풍경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게선 왜 이런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온전한 휴식의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구나.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우리도 이들처럼 조급함을 내려놓고 온전히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을까.
아직 우리 사회의 여행은 빡빡한 일정으로 투어를 소화하고, 줄을 서가며 유명 맛집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휴가를 마치 노동처럼 소비하는 우리의 여행 방식. 그게 과연 여행인지 또 다른 형태의 노동인지 모를 일이다. 이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편안히 쉬어가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 아닐까.
나는 발리에서 진정한 휴식과 힐링의 순간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
사실 발리에서는 10만 원만 넘어도 객실 외에 넓은 수영장, 스파, 레스토랑과 Bar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훌륭하게 누릴 수 있다. 물가가 비싼 일본이나 유럽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5성급 호텔에 머물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곳에 한 번쯤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는 단 하루의 화려한 숙박을 위해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보다 아낀 비용으로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하루라도 더 길게 이어가는 편을 좋아한다.
찰나의 럭셔리보다는 소박하더라도 행복한 시간을 길게 유지하는 삶. 화려한 남들의 기준보다 내게 적합하고 편안하면 그만이다. 짧고 굵은 한 번의 진한 여행보다는 가성비 좋게 끊임없이 길 위를 걷는 여행이 바로 나의 확고한 취향이자 삶의 방식이다.
작년 2월, 꾸따에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나만의 숙소 기준을 세우기가 참 어려웠다. 수많은 사람들의 리뷰가 나의 기준이 될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편안한 것이 나에겐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고, 그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래서 수많은 호텔을 검색하고 후기를 꼼꼼히 읽으며, 우선 구글 평점을 나침반 삼아 숙소를 선택하곤 했다.
당시 예약했던 곳은 비치워크 쇼핑몰 옆에 위치한 7~8만 원대의 '옐로우(Yellow)호텔'이었다. 특별한 부대시설은 없었지만, 개미나 도마뱀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깨끗했다. 이름처럼 벽면이 노란색 페인트와 화려한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명랑하고 발랄한 젊은 감각이 물씬 풍겼다. 한국인 리뷰가 유독 많았고 실제로 한국인 투숙객도 종종 마주쳤다. 하지만, 정작 '발리 특유의 감성'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첫 경험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꾸따를 찾았을 때는, 발리에 대한 나름의 학습이 되어 있었고, 어떤 호텔을 골라야 할지 명확한 기준도 생겼다. 그런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보석 같은 곳이 바로 '그랜드 라 왈란(Grand La Walon Hotel) 호텔'이다. 4층 규모의 이 호텔은 중앙에 넓고 쾌적한 수영장이 있다. 1층 로비 옆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아침 든든한 조식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주변에 와룽(현지 식당)과 카페, 쇼핑몰이 적당한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훌륭했다. 게다가 비수기 기준 5~6만 원대라는 합리적인 숙박료가 매력적이다. 넓은 객실과, 탁 트인 발코니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으니 나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호텔이 있을까. 앞으로 꾸따에 올 때면 망설임 없이 이곳을 나의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했다.
내게 꼭 맞는 숙소 하나가 이토록 극적으로 기분을 환기시켜 줄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나는 수영장 썬베드에 몸을 기대고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다. 오전에 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밖으로 나가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달리기를 하는 하루키의 일상을 가만히 상상해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된 것처럼, 이 나른하고도 평화로운 오후의 시간을 오롯이 내가 바라는 삶의 조각들로 채워나간다. 낯선 여행지에서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하며, 내 안의 생각들을 기록하는 이 고요하면서 찬란한 시간들.
발리의 태양 아래서, 하루하루 진짜 나의 삶을 사는 중이다.
다음편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