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동굴 272 계단의 변신

by 스칼렛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마지막날, 아침 일찍 서둘러 '바투 동굴(Batu Caves)'로 향했다. 이곳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힌두교 신상인 거대한 '무루간 신상(Lord Murugan Statue)'과 '272개의 무지개 계단'으로 이름난 힌두교 성지다.


부킷 빈땅에서 바투 동굴로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GOKL Purple Line 버스를 타고 센트럴 마켓에서 내려, '파사르 세니 - 쿠알라룸푸르 역 보행자 연결교(Pasar Seni - Kuala Lumpur Station Pedestrian Walkway)'를 따라 걸으면 어느덧 KTM 쿠알라룸푸르역에 닿는다.



바투 동굴은 쿠알라룸푸르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곰박(Gombak) 지역에 위치한다.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KTM 코뮤터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금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열차 안은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빠른 속도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이 열차는 다소 황당할 만큼 느릿했다. 열차인지 자전거인지 모를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달까. 한국이라면 10분이면 충분했을 거리를 30분 넘게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터치앤고(Touch'N Go) 카드 하나로 버스와 국철을 오가며 단돈 3.5링깃에 도착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자의 발걸음이 있을까.


역에서 내리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색의 하누만(Hanuman) 신상은 사실 우리의 목적지인 바투 동굴이 아닌, '라마야나 동굴(Ramayana Cave)'의 입구를 지키고 수호신이다. 여행 전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별도의 유료 사원이라고 한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곧장 직진했다. 그 길의 끝에서 드디어 우리가 그토록 기대했던 거래한 무루간 신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바투 동굴 역 바로 옆으로 있는 신상, 힌두교의 원숭이 신인 하누만 신상이다.


힌두사원은 복장 규정이 엄격하다. 미리 챙겨 온 사롱을 꺼내 무릎을 가렸다. 여자의 경우 어깨와 무릎을 가리는 것이 예의인데, 현장에서 당황하지 않게 미리 준비해야 한다.


100m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사진으로만 보던 황금빛 무루간 신상이 위용을 드러냈다. 그 옆으로는 272개 무지개 계단이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평일 오전임에도 계단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로 붐볐다.


바투 동굴 광장 밖에 위치한 스리 수브라마니아 스와미 사원(Sri Subramaniar Swamy Temple)


이전엔 회색이었던 이 계단은 2018년 개보수를 거치며 화려한 무지개 색을 입었고, 그 후 SNS를 통해 순식간에 '인생샷' 명소로 떠올랐다고 한다. 단지 색을 입혔을 뿐인데 전 세계인의 발길을 이끄는 핫플레이스가 되다니, 그 눈부신 '재탄생의 마법'이 새삼 놀라웠다.


폭이 좁고 가파른 272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오르니 동굴의 거대한 입구가 나를 압도했다. 수억 년의 세월을 견뎌온 석회암 벽면은 거칠고 투박했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스리 벨라유타르 사원(Sri Velayuthar Temple)의 천연색 조각들은 회색빛 동굴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바투 동굴 내에 있는 사원, 스리 벨라유타르 사원(Sri Velayuthar Temple)


사원의 화려함을 지나 동굴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거대한 돔처럼 뚫린 천장은 마치 석회암 거인이 하늘을 향해 숨구멍을 내놓은 듯했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은 습하고 어두운 동굴의 공기를 가르며, 신성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젊은 이들처럼 하트를 만들어보았다.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그 빛 아래 서서 고개를 들어 둥근 하늘을 바라본다. 투명한 파란색 바탕에 흩뿌려진 하얀 구름 조각들. 동굴 안의 어둠과 습기 속에서 만난 그 하늘은 마치 '미래의 창'처럼 느껴졌다. 두 손을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며 지금 이 순간과 다가올 미래를 축복해 보았다.


사원 앞 기부함인 '운디(Hundi)'에 작은 정성을 보태며, 2026년 한 해도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각자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무신론자이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신성한 장소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타지의 신들에게 무탈한 여행과 복을 빌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 그것 또한 여행의 축복이 아닐까.


바투 동굴의 무지개 계단과 무루간 신상은 내게 단순한 관광 이상의 가르침을 주었다. 평범한 계단에 색깔을 더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장소로 탈바꿈시킨 놀라운 감각. 우리네 삶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AI시대, 그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나만의 독특한 '결'이 담긴 색채가 필요하다. 바투 동굴의 계단이 색깔 하나로 생명력을 얻었듯, 내 삶에도 나만의 빛깔을 입히는 과정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내 인생은 지금 무슨 색깔로 채워지고 있을까?"


여행은 이렇듯 낯선 풍경 속에서 나를 성장시키고, 잊고 있던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가장 좋은 재료인 것 같다.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