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브러지고 포개어지고 - 1화
제주4.3길을 따라
널브러지고 포개어지고 - 1화
제주4.3길을 따라
(격월간 에세이스트 수록)
14, 15, 16화는 필자가 제주4.3길을 걸으며 곳곳의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립니다.
칠십 년 전 산으로 동굴로 쫓기고, 집에서 끌려 나오던 이들은 겨우 손톱만 한 총알에 몸이 찢겨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널브러지고 포개어져 까마귀밥이 되어갔다. 죽음의 현장과 현장을 이은 제주 4.3길을 7월 10일부터 3일간 홀로 걸었다. 쫓기듯 장마가 물러가고 살을 파고드는 폭염이 전국을 뒤덮은 7월, 섬 제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공항을 나서며 숨부터 턱 막혔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공항에서 가까운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을 먼저 찾았다. 바다로 이어지는 건천 옆에 현무암 돌담을 두른, 풀만 무성한 수십여 집터가 나타났다. 1949년 1월 초, 군인들이 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산폭도’가 경찰 두 명을 죽이고 마을 쪽으로 도망갔다는 생존자 증언 한마디에 토벌대는 마을 젊은이 이십여 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죽였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이어 수십 가구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그들은 좌익 무장대가 아니었다. 4.3 현장을 처음 접한 나는 가슴이 답답해왔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는 며칠간 이어질 나의 여정에서 겪게 될 충격의 서막이었다. 칠십 년 가까이 잃어버린 집터는 다시 찾는 이 없이 비어 있다. 55년이 지나서야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굿판을 벌이고 옛 마을 입구에 돌로 쌓은 해원상생거욱대를 세웠다. 해원을 바라는 마음뿐일 것이다. 그깟 굿판 하나 벌이고, 조형물 하나 세웠다고 해원이 되었을 거라 여기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너븐숭이의 절규>
이어 제주 북동 해안의 <북촌마을 4.3길>을 찾았다. 출발지는 <너븐숭이4,3기념관>이다. 이 마을에서 주민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다섯 채를 제외한 모든 가옥이 불타버렸다. 좌익 무장대 공격으로 군인 두 명이 죽자 국방경비대 주둔군은 보복으로 1949년 1월 17일 하루에만 무려 400여 명의 마을 주민을 살해하였다. 비록 한반도가 삼팔선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적진도 아닌 우리 땅에서였다.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재판도 없이 죽인 거였다. 전시관 안을 둘러보다가 자전거 여행 중인 중년의 남자가 중학생 또래의 아들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오래전에 공산주의자들이 난동을 부려서 제주 사람이 많이 죽었단다.”
대전에서 왔다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지만 제가 아는 것을 잠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무척 조심스러웠다.
“좌익 무장대가 삼백오십 명에서 오백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희생된 사람은 삼만 명이라 하고요. 당시에 제주도민이 삼십만 명이었으니까 인구의 10퍼센트가 희생된 것이지요. 물론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육지에서 건너간 군인과 경찰 손에 죽었다고 합니다. 아드님과 제주4.3평화공원에 가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관계만 짧게 언급했지만, 나는 혹여 이념 논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그는 무장대와 희생자 수에 크게 놀라며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아마 많은 이들이 제주 4.3에 대해 이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전시관 인근 북촌초등학교는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워 보였다. 교정으로 들어섰다. 그날 마을이 불타며 주민들이 이 학교로 끌려왔다. 이들 중에는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도 많았다. 토벌대는 군경가족만 앞으로 나오라 했다. 나머지 남녀노소 양민들은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븐숭이로 끌려가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을 받았다. 죽음을 예감한 그 사람들의 극심한 공포와 절규가 배어 있는 이곳, 죽음의 문턱인 학교 운동장에 나는 지금 서 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한날한시에 400여 명을 우리 군이 그렇게 죽였다. 지금 당팟은 검은 돌로 담을 두른 밭이다. 한차례 작물을 수확한 후 새로 갈아엎은 듯 트랙터 바퀴 자국이 나 있다. 밭에 들어가 흙을 손에 쥐었다. “죽여라, 죽여 봐라. 죽이고 또 죽여도 나는 살 것이다” 외치듯 피바다가 된 죽음의 땅은 보란 듯이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오목하게 쏙 들어간 너븐숭이 옴팡밭에는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투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문학비 주변에는 이곳에서 죽임을 당해 널브러지고 포개진 수많은 시신들처럼 기념비가 누워있다. 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고 묻혀 있던 4.3을 소설로 세상에 드러낸 현기영은 그 윗대가 당했듯이 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기념관 앞에 자그마한 아기무덤이 있다. 희생된 어른들은 나중에 다른 곳에 안장되기도 했지만, 어린아이들은 임시 암매장된 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린아이들까지 죽여야 했나···. 지금 북촌초등학교 아이들은 칠십여 년 전 이곳에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던 그들 조상의 극한 공포를 알까? 근처 아기무덤에서 아이들이 죽임을 당해 지금까지 그 자리에 묻혀 있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아직은 알지 말아야 한다.
냉이가 많이 자라는 낸시빌레에서도 청년 24명이 죽었다. 그들은 토벌대를 돕고 있었지만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분단 고착화를 우려하여 김구 선생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제주에서는 육지보다 선거 반대가 심했다. 많은 제주도민들이 선거일에 산으로 들어가 투표를 거부하였기에 더더욱 탄압이 심했다. 제주 4.3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비극만이 전부가 아니다. 강대국들에 의해 나라가 두 동강 나는 걸 막으려 했던 제주도민들의 민족의식도 기억해야 한다.
군인들이 마을을 불태워 모든 가옥이 사라졌다. 당시 제주 중산간 마을 95%가 재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