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득량역~개울고개~예당~신동리~조성면~칠동천 길~벌교읍 25km / 누적 173km
<다시 시작이다>
지난달 피치 못하게 중단했던 국토횡단을 다시 시작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위와 딸은 며칠 후 퇴원했다. 임신 중인 딸과 태아는 별 이상이 없었다. 아내는 나에게 다시 도보여행을 떠나라고 권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이 문제였다. 여성이 둘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첫아이의 출산 고통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만큼 출산의 고통이 크다는 것이다. 그에 비할 바 아니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 부실한 식사, 지저분하고 불편한 잠자리, 먼지와 발과 무릎과 온몸의 육체적 고통을 겪었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기를 열흘쯤, 남도의 고불고불한 길이 나에게 손짓하며 오라 한다. 그래, 내지르자. 남은 거리 270km를 걸어보자. 지금 안 하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다. 열흘 넘게 사업장을 맡아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와 아침 10시 넘어 득량역에 도착했다.
득량역에서 첫발을 떼며 호젓한 개울고개로 들어섰다. 숲이 길을 덮은 나무 터널 속에서 피톤치드를 흠뻑 들이키며 걷는다. 안개비가 내린 듯 길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온 천지가 구름에 휩싸여 오전인데도 어둑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다. 고개를 넘어 예당리를 지났다. 득량면 예당리는 면 소재지도 아니면서 초중고등학교와 공공도서관까지 갖추었고 경전선 예당역까지 품고 있는 규모가 큰 마을이다. 오늘의 목적지 벌교를 향해 예당역을 지나 북동진한다. 오른쪽으로는 득량의 예당 간척지가 뻗어있다.
<벌교 주먹>
오늘 도착지는 벌교다.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순천에선 인물 자랑 말고,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말라.”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수산물 어획이 많은 여수의 재정은 풍요로웠고, 순천은 예로부터 교통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벌교에는 주먹깨나 쓰는 자들이 많았다는 말인가.
벌교 주먹 탄생은 무뢰배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선 어느 의병장에 의해 탄생 되었단다. 1908년 벌교장터에서 조선 여인을 희롱하고, 조선인들을 채찍으로 후려치며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 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려 맨주먹으로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당사자는 20대 안규홍 의병장이다.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벌교 주먹’이라는 말이 돌았다. 안 의병장은 보성 지역에서 의병을 모아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26차례 전투를 벌여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친일 앞잡이 처단에도 앞장섰다. 그의 별칭은 담살이 의병장이다. 구한말 의병장이 주로 양반 계급이었지만, 안규홍 의병장은 머슴 출신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과 싸운 그는 1911년 체포되어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의병 활동하게 된 바탕에는 일본의 토지 침탈과 수탈, 일본인들의 횡포, 조선인 지주 계급의 가혹한 소작 등 근본에서는 반외세 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해방 이후에도 ‘벌교 주먹’은 약자를 보호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이것은 국권 수호와 저항정신의 의미라 할 수 있다.(벌교 100년사에서 인용)
18일 만에 다시 걷자니 몸과 다리가 아프다. 길에 몸이 적응될 때까지 앞으로 며칠간은 고생이 더 심하겠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