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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똥 - 58화

보성군 득량

by 조성현

갈매기 똥 / 보성군 득량


횡단 6일 차(4월 22일)

장흥 수문해수욕장~보성 득량역 25km / 누적 148km

<갈매기 똥>


오늘 코스의 1/3은 해안도로다. 오랜만에 자동차 도로를 피해 해안가를 걷는 기분이 색다르다. 해송과 바다와 섬의 조화가 압권이다. 걸으면서 예상치 않게 곳곳에서 절경을 마주하는 건 도보 여행자만의 특권이다.


출발지 장흥 수문해수욕장을 떠나 해안가 보성 군학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앞바다에 수십 마리의 갈매기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일렬로 서 있다. 나에게 힘내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였다.


몇 년 전 울릉도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홀로 울릉도 여행을 하며 성인봉, 나리분지, 해안 일주도로를 걸었고, 독도에도 갔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접안이 가능하다는데, 내 조상님 은덕 덕분인지 나는 독도에 발을 디디고 암벽을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었다.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저동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웬 청년이 해안가에 앉아 있던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었다. 갈매기들은 일제히 날아올랐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갈매기는 날면서 똥을 싼다. 순간 뭔가가 내 종아리를 철퍼덕 쳤다. 갈매기 똥이었다. 여기서 갈매기 똥 세례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머리에 맞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갈매기 똥이 내 울릉도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였고 그것은 다시 오라는 손짓이었다. 여기 군학마을 해변에 아무도 없으니 갈매기 똥 세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길을 잘 못 들다>


도보여행에서 가장 황당한 실수는 길 잘못 들어서는 것이다. 자동차로 이동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걸을 땐 문제가 커진다.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고 되돌아가려면 지나온 길의 두 배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25~30km를 걸으므로 그 이상 걸으면 피로도가 급상승한다.


오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율포해수욕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거늘 맥 놓고 걷다가 지나쳤다. 30분쯤 지나며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위치 확인해보니 2~3km가량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로도 도착지까지 갈 수 있지만, 보성녹차밭을 경유하는 오르막길을 6km가량 더 걸어야 한다. 가뜩이나 지친 내 발과 몸이 화를 낼 만한 거리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오고자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외국영화에서 본 것처럼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우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이번에도 바른 자세로 오른손을 겸손하게 들었다. 대부분 행락 차량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세워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형 승용차가 저 앞에 섰다. 내리막길에서 뒤차와의 추돌 위험도 있었다. 뒷좌석 문이 열렸는데 외국인 여성이었다. 운전자는 외국인 남성이었고 앞 조수석에는 십 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앞뒤 가릴 경황이 없었다. 차를 탄 후 내 소개가 필요했다. 도보 여행자이며 길을 잘못 들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마치자 어디까지 가냐, 총 얼마를 걷느냐, 며칠 걸리냐, 잠은 어디서 자냐, 몇 번째냐 등등 짧은 시간에 두 내외의 질문이 이어졌다. 400km라는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좌석에 앉은 딸은 가족 나들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니면 꾀죄죄한 아저씨가 차를 타서 그런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렌터카가 아닌 거로 봐서는 국내 근무 외국인이 주말 가족여행 나온 것 같았다. 나를 태워줘서 그런지 사람들이 착해 보였다.

<도보 중단>


오늘로 도보여행을 중단했다. 오후 1시 반쯤이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마찬가지로 한적한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점심때라 구운 달걀과 빵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을 통해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위가 운전하는 차가 정지 신호에 멈춰 있었는데 뒤에서 다른 차가 추돌을 했단다. 함께 탔던 딸은 8월 출산 예정인지라 구급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불안에 휩싸였다.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불행 중 다행으로 사위와 딸은 사고 규모에 비해 부상이 심하지 않았다. 태아도 이상이 없었다. 사위도 병실에 드러누워야 할 상태임에도 평소 아내 바라기 그대로 산모인 제 아내 곁에서 간호하며 밤을 지새웠다.


나는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도보여행을 중단키로 하였다. 1년에 한 번, 관광여행도 아닌 장거리 도보여행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몸이 힘든 것도 문제지만, 적지 않은 비용과 사업장을 보름 이상 아내에게 맡겨야 하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쉽지 않게 시작했기에 중단 결정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자식이 사고를 당했다. 아쉬움에 앞서 서둘러 집에 와야 했다. 아내는 딸의 상태가 위험하지 않고, 내가 없어도 혼자 수습하겠다며 멈추지 말라고 했지만, 임신 중인 딸은 한동안 입원이 필요했다. 내가 없으면 아내는 매일 사업장에서 일하며 동시에 딸과 사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무척 힘든 상황임에도 나를 위해 중단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장이자 아비가 돼서 나만을 위할 수는 없었다.


남해안 끝자락에서 서울 가는 차편부터 찾았다. 득량역에서 경전선을 타고 순천역에 가서 KTX를 타야 오늘 중으로 집에 갈 수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득량역 발 열차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10km 정도 거리라서 만만치 않았다.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뛰다 걷기를 반복했다. 무게를 줄이려고 생수도 조금만 남기고 쏟아 버렸다. 스마트폰 지도에서 지름길을 찾다 보니 사람의 통행 흔적은 없고 잡풀만 무성한 이상한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저 멀리 자동차 길을 보며 들을 가로질렀다. 길가 이층집 마당을 관통하는 무례도 범했다.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진 어느 마을을 지나며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내 위장을 자극했다. 오늘 먹은 거라곤 아침에 숙소에서 끓여 먹은 라면 한 개와 점심으로 구운 달걀 하나 빵 한 개가 전부였다. 타는 목은 물 한 모금으로 달래며 뛰고 또 뛰어 득량역에 닿았다. 순천행 열차 시각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언제 또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도착지 득량역에 다다르기 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며 뒤를 돌아봤다. 산자락 아래 편안하게 자리 잡은 농가, 손에 잡힐 듯한 푸르른 산, 작물을 키워내는 푸른 밭 그리고 그동안 나와 함께 한 길. 언제 내 두 발을 디디며 이 모습을 또 볼 수 있을까….

내일부터 일상으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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