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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선반 위 태백산맥 - 60화

순천

by 조성현 Feb 22. 2025

지하철 선반 위 태백산맥 / 순천     


국토횡단 8일 차(5월 11일)

벌교읍~금치길~순천 별량면~순천역 25km / 누적 198km     


벌교읍을 벗어나 잠시 4차선 국도 2호선에 올랐다. 이 길은 한반도 남단 목포와 부산을 잇는 도로다. 순천까지 국도와 경전선 철로 옆 작은 도로를 따라 걸었다. 걷기가 전신운동이라는데 맞는 말이다. 발과 다리가 아픈 거야 당연하지만 나의 튼실한 엉덩이도 쑤신다. 무거운 배낭도 며칠 지나면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무게감이 떨어질 것이다. 문제는 5월의 더위다. 내리꽂는 햇살에 배낭 안에 있던 내 점심 앙꼬빵이 따스해졌다. 상하지 않아 맛있게 먹었다. 왜 상하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배고픈 나는 맛있게 먹을 따름이다.  


벌교는 꼬막의 고장이지만 꼬막 식사는 나 홀로 여행객에게 과분하여 먹지 못하였다. 그보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이 나의 뇌리에는 더 깊이 박혀 있다. 숙소 근처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예전에 가보았고, 개장 시각이 일러 오늘은 지나쳤다. 


조정래 작가는 집필 전 엄청난 자료 수집과 탐사로 유명하다. 작가적 상상력도 풍부한 지식과 자료가 바탕이 되어야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글은 사유에서 나오고, 사유는 작가의 독서와 경험에서 나온다. 자료 수집도 독서의 범주에 속한다. 『태백산맥』 집필을 위해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찾아다녔지만,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포기하지 않고 끝내 그들의 입을 열게 하여 대작을 완성하였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정래 선생은 사후에도 50년까지 후손들이 인세를 받는다. 작가는 자손들에게 인세를 받으려면 태백산맥 열 권을 필사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대작가답다.


나는 1990년 소설 『태백산맥』 출간 후부터 한 권씩 10회에 나눠 구입하여 출퇴근 전철 안에서 읽었다. 전철은 나의 독서실이 되었다. 매우 아끼는 소설집을 가까운 지인이 내 집에 놀러 왔다가 열 권 빌려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그가 귀가 중 실수로 지하철 선반에 두고 내렸다. 가슴이 쓰렸지만 잠시 안정을 취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누구든 가져가서 감명 깊게 읽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마음이 평온해졌다. <태백산맥 문학관> 정면에 걸린 조정래 작가의 말씀이 가슴에 크게 남는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흑역사도 역사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열차역 건물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1920년 영업 개시한 경의선 신촌역, 1939년 경춘선 화랑대역과 신남역(김유정역) 등 일부만이 남아 폐역인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폐역사(廢驛舍)는 대부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으로서 기능은 근처 신청사가 대신한다. 


오늘 지나다가 처음 본 순천시 별량면 원창역은 철도 직원이 근무하지 않는 무배치 간이역이다. 규모가 작고 내부는 비었지만 폐역은 아니다. 1930년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닌 등록문화재 제128호 건물이다.


총독부 건물이었던 옛 중앙청 건물 철거를 두고 찬반양론이 격론을 벌였다. 우리에게 흑역사의 잔존물인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보존해야 할까 아니면 철거해야 할까. 아픈 과거도 우리 역사이므로 전면 철거보다 일부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본다.


정작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다. 궁궐 등 조선 시대 건축물에서는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현재의 생활 양식과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건축물은 기본 설계가 근현대 양식을 따르기 때문에 이질감을 덜 느낀다. 백 년 내의 건축물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는 약간의 동질감과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건축물을 짓지 않았다. 효율적인 식민지배가 목적이었다.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흑역사도 보존이 필요하다는 것은 외세의 침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 있다. 이것을 간과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한다. 식민 시절의 고통과 압제 대신 향수에 머물게 하고,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맥을 같이 하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조선은 일본과 1883년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인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했다. 이후 조선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포항시 구룡포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 일본인들이 살던 가옥이 몇 채 정도 남아 있었다. 포항시는 그곳에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였다. 일본의 다양한 차와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일본 의상인 유카타와 기모노를 입는 체험도 할 수 있다. 민간의 한일교류는 권장할 만하지만, 식민지배를 겪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지자체에서 굳이 일본 정취를 느끼도록 세금으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조일통상장정은 개방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전초전 성격인데도 말이다.   

   

<오늘의 이모저모>


지나는 자동차도 거의 없고 사람 구경도 어려운 마을 근처 길을 걷다가 양말 벗고 쉴 때였다. 초로의 사내가 제초제 통을 짊어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걸으며 지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이번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한가하게 걷고 있지만 그는 농사일에 지쳤는지 기운 없이 걷고 있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종착지인 순천역에서 선배 수필가 안규수 선생과 서울서 내려온 수필가 박춘 선생을 만났다. 안규수 선생은 재작년 국토종단 때 보성군 복내면으로 오셔서 체력보강용 저녁을 근사하게 사주셨다. 박춘 선생은 보성군 조성면 출신으로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사유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필로 수필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두 분은 술을 드시지 않는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며 가까워지곤 하지만 두 분은 서로 책을 권하고, 각자 쓰신 글을 읽고 논하는 과정에서 우정이 깊어졌다. 문우(文友)는 아무리 가까워도 서로 존중하며 예를 갖춘다. 순천에서 함께 저녁 먹고 멀지 않은 박춘 선생 고택을 찾았다. 비록 쇠락했어도 과거 지주 가옥답게 집터가 엄청나게 크다. 늦은 시각인데도 구순 노모는 예고 없이 찾은 객을 무척 반갑게 맞이하시며 다음에 꼭 오라 당부하신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생각났다.


장거리 도보여행은 결코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다. 내 몸의 고통이야 그러려니 한다. 황사와 미세먼지에 더불어 더위가 발길을 붙잡지만 난 뚜벅뚜벅 걸을 뿐이다. 내일은 전남 광양시 옥곡면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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