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수염을 깎았다. 작년까지 매년 도보여행 내내 수염을 깎지 않았다. 평소에는 수염 기를 일이 없으므로 이참에 오래 길러 볼 요량이었다. 야성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지저분해 보였다. 내 구레나룻은 평소에 몰랐는데 흰 털만 나 있었고, 콧수염과 턱수염은 흰 털과 검은 털이 뒤섞인 데다 가닥 수가 많지 않아 마치 쥐 파먹은 모양새다. 이번엔 자주 밀기로 했다. 깎고 보니 말쑥하다. 남들도 그렇게 볼까?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국토횡단 2일째 진도대교를 건너며 울돌목의 휘돌아가는 물살을 보았다. 남도 곳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많다. 수문해수욕장에서 동북으로 4km 떨어진 해안가 군학마을을 지났다. 파직된 장군께서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어 처음 출항한 곳이 이곳이고, 이곳을 기점으로 보성군 일대에서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에서 열 배가 넘는 왜선을 격파했다.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대승으로 기록된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르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1805년 넬슨의 영국 함대는 22척이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33척으로 큰 차이는 아니었다. 이곳 군학마을 입구에 세워진 대리석 기념비에는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즉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득량은 슬프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병이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무능한 선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아니 조선의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야반도주했다. 성난 백성들은 텅 빈 궁궐로 쳐들어갔다. 아랫녘 이순신이 지휘하는 남도 수군은 왜선을 격파 중이었다. 전쟁 와중에 무능한 조정은 이순신에게 죄를 둘러씌워 압송한다. 선조는 백성들의 신임이 두터운 이순신이 마음에 걸린 건 아닐까? 간신배들의 꼬임은 핑계일지 모른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합리적 의심이 든다. 조선이 제 것인 양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나라가 왜군에게 짓밟혀 백성들이 도륙을 당하든 말든 명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그것도 권력이라고 조자룡 헌 칼 쓰듯 이순신을 제거한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무능함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된다. 나라보다 자신들의 권력이 왜군에 의해 무너질까 두려운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였으나 남아 있는 전선은 고작 12척뿐. 게다가 군량미가 부족한 수군의 위기는 조선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순신은 이곳 득량에서 양식을 구했다. 득량(得糧) 지명의 유래가 된 이유다. 군량미가 안정되며 이순신의 수군은 그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열 배 이상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임진년에 시작한 왜와의 전쟁은 끝을 맺는다. 득량에서 군량미 확보가 왜란 후기 조선을 구한 중요한 단초였다. 곡창 호남을 지켰기에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전라도의 해로가 뚫리면 왜군은 곧바로 서해안을 따라 한반도를 도륙 낼 수 있고,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짓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호남은 당시 나라의 명운을 가를 만큼 중요하였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가 탄생한다. 즉 호남을 방어하지 못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명량해전의 대승은 분명코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 덕분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민관군의 합심이 있었기에 군량미를 준비하고, 화살을 만들고, 포탄을 만들고 등등이 가능했다. 이순신의 리더십과 역량이 승리의 주요 요인이었지만, 전승의 주역은 이름 없이 헌신한 백성들이다.
임진왜란 318년 만인 1910년 경술년에 조선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의주로 도주했던 임금과 권력자들의 후예인 양반 지배층은 일본이 던져준 알량한 과자를 받아먹고 나라를 통째로 왜(倭)에 넘겼다. 일본은 한반도 각지에서 고혈을 빨아 수탈하였다.
300여 년 전 호남을 집어삼키지 못한 보복일까. 수탈은 곡창 호남에 집중하였고, 군산과 목포는 수탈의 통로가 된 비운의 도시가 되었다. 일제는 원활한 수탈을 위해 철도를 부설하였고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다.
호남의 남쪽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경전선을 건설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백성을 강제 동원해 이곳 득량 앞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었다. 여기서 생산한 쌀을 득량을 가로지르는 경전선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왜병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한 득량의 식량이 300여 년이 지나 왜(倭)에게 갈취당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물러나고 역성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득량역과 주변에 7080 추억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중년의 남녀 넷이 역 앞에서 빌려주는 오래전 교복을 빌려 입고 70-80을 즐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말까지 입었던 왜색(倭色)의 그 교복을 이 땅의 지도자들은 35년 동안이나 우리의 학생들에게 입혀왔다. 지금도 하루 네 번 경전선 득량역에서는 무심히 승객들이 열차에 오르고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