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발발의 배경 - 제9화
제주4.3 북촌 생존자들의 증언
(계간 수필미학 수록)
필자는 제주4.3 생존자 할머니 두 분과 인터뷰를 하였고, 분 연재는 두 분의 증언록임을 알립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행사에 3만여 제주도민이 모였다. 제주 개벽 이래 최대 인파가 모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살기 어려운 것은 외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라는 자각에 기념식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관덕정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친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경찰이 그대로 가자 군중들은 항의하였다. 이에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도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갓난아이를 업은 여인을 포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이 제주4.3 도화선이라고들 한다. 미군정과 경찰은 정당방위라 주장하며 시위 주동자들을 잡아다 고문하였다.
제주도민들의 분노도 커져갔다. 그 분노는 총파업으로 이어져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검찰, 법원 등 관공서, 운수회사 금융기관, 학교로 퍼졌다. 파업은 좌우 구분이 없었다. 경찰 66명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색깔론을 내세워 제주도를 red island 즉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군정장관 도지사 경찰 수뇌부를 극우 성향으로 교체하였다. 총파업에 참여한 경찰을 파면하고, 관공서와 교육계에 숙청작업을 시작하여 파업에 관여한 사람들을 몰아내었다.
미군정은 북을 고향으로 둔 서북청년단을 경찰로 임명하여 제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행정과 경찰조직도 무력화시키며 제주도민에게 테러를 일삼았고, 고문치사 사건도 잇달았다. 3.1절 발포에 대해 경찰과 미군정의 사과가 있었다면 양상은 달라졌을 거라는 견해가 있다.
여성들은 납치, 성폭행, 살해 등 이중 삼중으로 수난을 당했다.
“아니 그 사람들 서북청년단 사람들은 사람 죽이는 거를 파리 새끼 죽이는 것처럼 했어. 사극에 나오는 머리에 쓰는 갓 있잖아요. 말꼬리 털로 만들잖아. 그거를 만들면 돈이 생기니까 젊은 엄마들이나 처녀들 대여섯 명 모여 앉아 만들었어. 그러면 그걸 사러 오는 사람이 있어. 한번은 그런 언니들 6명이 모여 앉아서 분꽃 열매로 분을 만들어서 화장하며 놀았어. 그렇게 모여서 노는 여자 6명을 끌고 갔잖아. 끌려간 언니들의 엄마들이 함덕에서 한지훈이라는 청년단장에게 물질해서 얻은 전복 같은 거를 주면서 어디에 갇혔는지 물었어. 나중에는 어디서 죽었는지 죽은 장소라도 가르쳐 달라고 했어. 며칠 있으니까 연락이 와. 어디에 몇 명 죽이고 어디는 물에 가서 집어넣고. 대창을 가지고 여자들 여기저기 다 찔렀다고. 총 쏘면서 물에 세워놓고. 이 서우봉 몬주기알에서 총 쏘면 물에다 떨어지잖아.”
미군정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 기슭에서 봉화가 타오르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시작하였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 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5.10 선거를 반대한다”였다. 무장대는 초기 불과 350명에서 시작하여 최대 500명 정도였다.
<아래 사진은 제주4.3기념관 전시 내용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