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잉태한 남한 사회 - 제10화
제주4.3 북촌 생존자들의 증언
비극을 잉태한 남한 사회 - 제10화
제주4.3 북촌 생존자들의 증언
(계간 수필미학 수록)
필자는 제주4.3 생존자 할머니 두 분과 인터뷰를 하였고, 분 연재는 두 분의 증언록임을 알립니다.
여기까지 보면 제주도 인구 1/10이 희생된 제주4.3이 우발적 사건으로 발생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해방 후에도 계속된 민중 수탈과 미군정의 실정 그리고 친일 청산 문제가 뒤섞인 결과였다. 1946년 10월에 터져 전국으로 확산된 대구10월항쟁도 일제강점기 정치·경제·사회구조가 미군정에 의해 유지되고 확대되는 것에 반발한 남한 주민의 저항이었다. 특히 미군정의 양곡관리 실패와 강제적 쌀 공출, 양민들에 대한 미군정 관리의 수탈과 부패가 남한 사회 민중을 분노케 하였다.
- 어린 완순의 외할아버지도 친일 경찰과 관리의 수탈과 탄압으로 희생당했다.
“내가 기억나는 걸 말해줄게요. 외할아버지가 담배 공출 농사지으려고 씨앗을 매달아 놓은 거를 내가 씨앗을 내려서 인형 놀이를 해버렸어. 할아버지가 봄이 되어 담배 농사를 지으려고 했는데 씨앗이 없어졌잖아요. 내가 헝겊을 가지고 노는 걸 보고 내가 범인이라고 해서 회초리로 맞은 거야. 그래서 어디에 쏟아 냈냐 하면 타작기 아래에다 버렸어요. 그걸 할아버지가 붓으로 쓸어 담아서 농사를 지었는데 담배 농사 물량을 다 채우지 못했어. 공출 물량을. 그래서 조천주재소에 불려가서는 매를 심하게 맞은 거에요. 할당량 못 채웠는데 빼내서 팔아먹었다고. 매를 맞고 나서 한 6개월 앓다가 그 길로 돌아가셨어. 4.3이 1948년에 났는데 할아버지는 1947년 8월인가 돌아가신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 잡아먹은 년’ 소리 듣고 외할머니 미움받았어요.”
“해방이 됐는데 행정은 왜정 때 그대로 있었어요. 경찰도 그대로 있고. 일본놈들은 자기 나라로 갔는데 거기 붙어 있던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농사지은 거를 또 공출을 하라고 그랬어. 여기는 땅이 척박해서 조나 보리, 메밀,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고구마를 썰어서 말려서 공출하면 주정 공장이나 이런 데 가서 술을 뺐어. (*항공 연료가 부족한 일본군은 고구마로 고순도 알코올을 제조하여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거는 담배 공출이에요. 담배 씨앗이 상추씨하고 똑같아요. 그거 심으면 상춧잎 올라가듯이 올라가는데 그걸 따서 시래기 엮듯이 엮어 말려서 단을 만들어서 그걸 공출시켰어. 해방된 후에도.”
- 북촌 마을에는 1948년 제주4.3전부터 이미 탄압이 시작되었다.
“우리 삼촌들이 말했어요. 이제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는데 왜 그 일본놈 앞잡이들한테 공출당해야 하느냐. 이런 식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어. 그렇게 반항을 하다 보니까 우리 북촌 마을이 찍히게 된 거야. 이 마을은 요시찰 인물이 있는 마을이다, 그때부터는 경찰이나 행정에서 제재를 가해왔어요. 뭐하면 잡아가고, 왜정시대처럼 막 때리고. 그러다가 군부대가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서북청년단(순경)이 들어오고.
삼촌들이 한 달에 한 번인가 보름에 한 번인가 색소폰 불고 나팔 불면 사람들이 그거 들으려고 쫓아와서 다녔어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위험인물이 모이는 동네라고 또 낙인찍혔어. 남자들을 잡으러 오니까 다시 일본으로 피난 가는 사람, 부산으로 가는 사람 아니면 집에 땅굴 파서 숨기도 하고, 산에 가서 숨고. 4.3 나기 전부터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정어리 잡으러 원산 청진으로도 갔어요.
마을에 하루는 군인 차가 오고 그다음 날에는 순경 차가 와요. 차가 간 다음에 남자들이 숨었다가 나와요. 나보다 나이 더 먹은 학생들이 보초를 섰어요. 군인 경찰차가 오면 국방색 깃발을 눕히고, 가면 세우고. 손으로 신호도 하고. 수신호도 보내고. 이 언니(이영자 할머니)도 보초 섰어요.
낮에는 엄마들이 하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다 환자가 돼서 드러누워. 그러면 총 끝에 칼을 꽂아서 칼로 문을 착 열어 가지고 아들 어디 갔어 신랑 어디 갔어 찾는 거야. 산사람도 무섭고 군인도 무섭고 순경도 무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