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홀로 앉아 우리의 짧은 생과 인생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을 연기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본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프랑스의 18세기 로코코 문화의 핵심을 '페트 갈랑트 (Fête galante)'라고 부른다. '우아한 연회' 정도로 직역될 수 있지만 좀 더 풀이해보면 아름다운 전원에서 상류층 인사들이 즐기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사교 모임의 흥취, 혹은 그런 장면을 담은 예술작품을 의미한다. 프랑스 로코코 문화는 궁정생활과 귀족의 일상을 소재로 삼아 달콤한 연애와 고상한 모임을 소재로 삼았다. 프랑수아 부쉐의 그림에서처럼 상류층의 소꿉장난 같은 사랑놀음이나, 장 안투안 와토의 그림 속에 묘사된 귀족들의 우아한 몸짓은 풍류 넘치는 시정을 자아낸다. 이런 풍속은 복잡한 궁정 생활을 뒤로하고 전원 속에서 살고자 하는 귀족들의 바램, 아르카디아와 같은 이상향에 대한 바램을 담고 있기도 했지만, 세련된 예법과 우아한 언행으로 연인과 밀어를 주고 받는 '사랑이 있는 풍경'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담고 있기도 하다. 17-18세기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예법의 시대였고, 프랑스의 궁정 예법이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의 세련된 에티켓으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페트 갈랑트'의 사교적 분위기는 프랑스 귀족문화가 낳은 미학의 정점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음반의 주인공인 음악가 미켈레 마시티(1643-1729)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나폴리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709년 파리로 이주해 활동했으며, 루이 14세 서거 이후 오를레앙공이 섭정하던 시대에 오를레앙 공의 후원을 받아 왕실에서도 활동하는 등 당시 프랑스에서 높은 음악적 커리어를 쌓은 이탈리아인이다. 이 음반에 담긴 마시티의 <소나타 op.9> 작품집은 모두 12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구성되었고 그의 사후 1738년에 출판되었다. 이 음반은 그중 9곡을 최초로 레코딩한 음반이다.
장 앙투안 와토, <야외에서의 즐거운 모임>, 1718년경
미켈레 마시티가 활동할 당시 프랑스에서 문화예술 생산은 베르사이유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부유한 은행가와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미술과 음악은 베르사이유의 장려한 양식에서 벗어나 보다 내밀하고 사적인 내용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그게 로코코 예술의 기본 특징이다. 또한 루이 14세 시대 정형화된 프랑스 음악 이외에도 이탈리아 스타일의 음악(주로 3악장으로 구성된 당대 이탈리아 소나타 등)을 자주 연주하기도 했다. 신흥 부자들은 문화계를 주도하며 살롱 연회를 통해 로코코 예술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음악가 마시티 역시 부유한 상인 후원자를 두었고 그 후원자의 살롱에서는 각종 음악과 춤, 문학 발표회가 열렸다. 음악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연극 양식인 코메디아 델라르테(comedia dell'arte)에 음악이 곁들여져 사랑의 '페트 갈랑트'를 재현하는 작은 연극무대가 귀족의 저택에서 열리기도 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특정 캐릭터들이 가면을 쓰거나 분장하고 등장해 개그를 섞어 연기하는 일종의 즉흥적인 연극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그 전형이 만들어졌고 17세기까지 전 유럽에 퍼져 각기 문화적 상황에 맞게 상연되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선진 예술은 프랑스 지식인 살롱의 주요 주제이기도 했으며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이탈리아 희극 양식은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마시티의 이탈리아 양식 음악은 이런 희극 문화와 더불어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 퍼진 이탈리아 예술 애호 경향을 잘 나타낸다.
이 음반 표지로 사용된 그림은 장 앙투안느 와토의 <이탈리아 희극배우들>(1720)로 그림 속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삐에로다. 삐에로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연극 무대에서 언제나 흰 옷을 입고 등장해 우스꽝스러운 역할, 연인들의 사랑을 맺어주는 전령사 역할 등을 맡았다. 피에로를 음반 커버로 쓰면서 이 음반의 주제는 더 명확해졌다. 마시티가 프랑스로 가져온 '이탈리아 양식'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당대 파리의 살롱에서 유행했던 '이탈리아 예술'이 그 주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제들을 모두 관통하는 것은 '페트 갈랑트'로 대표되는 프랑스 로코코 문화이다.
장-앙투안 와토 <피에로 질> 1718 - 1719
마시티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갈랑트 양식을 대표한다. 감미롭고 사랑스러우며 씁쓸하고 애상적인 선율 속에는 사랑놀음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듯하다. 노래하는 선율 감각이 대단히 뛰어나 모든 멜로디들이 쉽게 귀에 꽂히고 살가운 바이올린 연주는 피부에 와닿아 살랑거린다. 소나타 1번은 이탈리아의 감미로운 악상과 춤곡의 리듬 있는 형식을 애호한 프랑스 양식을 조화를 들려준다. 12번 소나타의 경우 18세기 당시 유행한 대위법과 반음계적 기법이 두루 사용되어 언뜻 바흐를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마시티는 18세기 여러 나라 음악 양식의 선진 모델을 민감하게 조합했다. 하지만 소나타의 어딘가엔 멜랑콜리한 음영이 깃들어있다. 소나타 1번의 1악장을 여는 선율은 더없이 세련되고 아름답고, 12번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은 춤곡의 발걸음이 더없이 흥겹지만 그 속엔 단조의 애상이 스며들어가 있다.
와토의 그림 <야외에서는 즐거운 모임>속의 귀족들은 어딘가 인형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의 멜랑콜리함을 풍긴다. 문화사가 아널드 하우저는 이들을 박제된 인형처럼 묘사했다. 값비싼 옷을 입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귀족의 예법과 우아한 몸짓으로 사랑을 속삭이지만 그림 속 풍경은 마치 한낮의 멈춰진 꿈같다. 우리는 모두 이 화려한 꿈속의 광대가 아닐까. 이들은 모두 자기 생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아닐까. 코메디아 델라르떼의 희극인들이 인생이라는 비극을 희극이라는 웃음으로 표현해냈듯이, 우리 모두는 세계라는 무대의 광대가 아닐까. 마시티의 나긋한 소나타 선율은 사랑의 대화처럼 달콤하지만 혀 끝에서 사라지는 단 맛과 같다. 우리의 시간도 단 맛처럼 흘러간다. 곧 사라질 것에 대한 기쁨과 애상.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마시티의 바이올린 선율 속에 담겨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