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김밥 말고

도시락에도 공식이 있다

by 가을강사

소풍 도시락 하면 김밥 아닌가요?

저는 그랬어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요. 일본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했지요.

첫째의 유치원 소풍날이면 시금치, 단무지, 계란 당근 김등을 사서 준비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았습니다.

일본 선생님들도 "와, 한국 김밥!" 하며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몇 번을 싸줬을까.

어느 날 첫째가 말했습니다. "엄마, 김밥 말고 나도 일본 애들처럼 도시락 싸 줘."

"... 응?" "다른 애들 예쁜 도시락 먹고 싶어."


다음 날 도서관에 갔습니다.

'도시락' 코너에 책이 수십 권. 한 권 집어 펼쳤는데, 첫 페이지부터 난감했어요.

'문어 소시지 만들기: 소시지에 세로로 2개의 칼집을 넣고...'

'삼각 주먹밥: 소금물을 손에 무치고 삼각형 모양을 만들기 위해 여러 번 다듬고...'

'계란말이: 계란물을 여러 번 나눠 부어 말고...' 3번이요?

책을 덮었습니다. 김밥은 그냥 재료 넣고 말면 되는데, 이건 요리가 아니라 공예 같았어요.


슈퍼에도 갔어요.

도시락 재료 코너 앞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작은 소시지 6개 들이, 모양낸 어묵, 별 모양 치킨 너겟, 곤약...

'이걸 다 사야 하나?' 카트에 하나씩 담으면서도 확신이 없었어요.


딸아이의 소풍날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펼쳐놓고 하나씩 따라 했어요.

한국에서도 계란말이를 해봤지만, 일본 계란말이는 더 많이 계란을 말아야 하지요. 그래야 두툼하게 만들어 져요. 그런데 말다가 모양이 잘 안 나오고 주춤하다 보면 타버리고... 겨우 완성은 했지만, 잘라보니 밀도 있게 말아지지 않았더군요. 소시지에 칼집 넣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너무 깊게 넣으면 다 잘려나가고, 얕게 넣으면 익어도 안 벌어지고. 주먹밥은 삼각 모양이 잘 안 나왔어요. 동그랗게 뭉치면 너무 크고, 작게 만들면 밥알이 다 떨어져 나가고.


그래도 겨우 일본 도시락을 흉내 낸 도시락을 싸서 보냈습니다.

소풍에서 돌아온 첫째에게 "도시락, 맛있었어?" 물어보니 "응." 만족해했습니다.


몇 달 후, 둘째 딸 유치원 소풍에 따라갔어요.

점심시간. 아이들이 돗자리 위에 도시락을 꺼내놓았습니다.

옆 아이 도시락통 뚜껑이 열렸어요.

'와...'

빨간 방울토마토 세 개가 한쪽 구석에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그 옆에 노란 계란말이가 두툼하게 두 개. 오랜지 빛 소시지는 칼집을 넣어 문어 다리처럼 벌어져 있었고, 미트볼,고로케. 하얀 주먹밥에는 김 조각으로 얼굴 모양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다른 아이 도시락도 봤어요. 역시 비슷했어요. 간장에 조린 동그란 밤, 네모난 어묵, 초록색 브로콜리, 별 모양의 주황색 당근. 하나하나 제 모양을 갖추고 있었어요. 다른 도시락엔 간장에 조린 단호박, 알록달록한 어묵 등등. 책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예쁜 도시락들을 실제로 여기 저기서 보게 되었습니다.


부럽고, 우리 딸들이 왜 일본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다시 한번 찬찬히 도시락들을 살펴보았다. 엄마들이 싸 온 도시락도 비슷했다. 연근 조림이 동그란 구멍을 유지하고 있었고, 우엉은 길쭉한 막대기 모양 그대로, 곤약은는 네모반듯하게, 새우 튀김은 두툼한 모양으로.


다 입체였어요.

동그랗거나, 네모나거나, 두툼하거나. 도시락통 안에서 서로 기대고 있어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것들.


그 순간 퍼뜩 떠올랐어요. 한국의 도시락은 김치, 시금치나물, 콩나물, 멸치볶음, 계란지단... 다 납작했어요. 특히 나물 종류들은 점심때 도시락 뚜껑을 열면 아침에 담을 때의 풍성함은 사라지고 납작해 있다. 당연하지만.. '아, 그래서...'


집에 돌아와 슈퍼에서 가서 다시 찬찬히 보니까 달리 보이더라고요.

도시락 재료 코너의 연근 조림. 우엉조림, 밤조림, 네모난 모양의 곤약과 어묵. 심지어 채소도 달랐어요.

한국 도시락에 자주 들어가는 건 시금치, 콩나물 같은 잎사귀 채소인데, 일본 도시락 재료는 연근, 우엉, 당근, 무 같은 뿌리채소가 많더라고요.

한국 반찬은 단연 잎채소같은 나물이 많잖아요. 하지만 일본 반찬에는 뿌리채소가 많은 것 같아요.

잎사귀 나물들은 삶고 무치면 시간이 지나 납작해지지만, 뿌리 채소는 쪄도 삶아도 형태가 유지되지요.


일본 엄마들이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형태가 유지되는 재료를 쓰는 거였어요.

그것이 자연스럽게 도시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그것에 더해 색을 더하니 예쁜 도시락이 된 거였어요.


그 후로는 조금 편해졌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두툼하게 계란말이를 하고 방울토마토는 그냥 씻어서 넣으면 그만이고, 브로콜리도 삶아서 넣으며, 모양 있는 어묵과 콩조림을 넣고 나물은 아주 작은 예쁜 도시락 용기에 넣으면 끝. 주먹밥도 여러 번 해보니 삼각형 모양이 나왔습니다. 물론 주먹밥을 꾸미는 것은 좀 어려웠지만요.

튀김도 해봤어요. 전이나 부침개는 많이 해 봤지만, 튀김은 해보지 않아서 인지, 튀김 온도, 익은 정도를 잘 몰라서 태우기가 일쑤였습니다. 성공한 적이 별로 없어서, 끝내 튀김은 만들지 못하고 사서 넣었습니다.


일본은 기차역 도시락이 유명한데 신간센을 타고 동경에 갈때 기차역에서 도시락을 사서 뚜껑을 열었을 때, 감탄이 절로 나와요. 콩, 우엉, 연근, 어묵, 무, 튀김, 당근, 곤약, 밤. 한 칸 한 칸에 형태 있는 재료들이 꽉 차 있어요. 마치 작은 보물상자 같았어요. 일본 음식은 맛뿐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다잖아요. 색과 모양이 중요시 여겨요. 그게 도시락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였어요.


처음 일본 도시락 책을 보며 '일본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냥 형태 있는 재료를 쓰는 거였어요. 거기에 색을 더한 것이지요. 납작한 나물 대신 동그란 방울토마토, 얇은 전 대신 두툼한 튀김, 시금치 대신에 브로콜리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모양이 나더라고요.

도서관에서 빌린 그 예쁘지만 어려워 보이던 책들도, 사실은 이 간단한 원리를 적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맛은?

저는 여전히 김밥이 최고입니다. 특히 집 김밥은 비교할 수가 없지요.

혹시 배고파지셨나요? 오늘은 김밥 재료를 사서 김밥을 만들어 먹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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