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없는 비빔밥

K-food까지

by 가을강사

기억이란 사막의 모래와 같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형체를 조금씩 잃어간다. 일본에서 보낸 17년의 세월이 이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추억을 생각을 적어본다. 사라지기 전에.


"엄마, 급식 참관 오는 거지?"

첫째가 5학년 때였다. 가방에서 구겨진 안내문을 꺼내 흔들었다.

일본 학교는 부모가 참관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새 학기 시작하면 일 년 치 일정표가 나오고, 중요한 참관일은 석 달 전부터 알려준다. "이날은 꼭 오세요." 일하는 엄마들도 미리 휴가를 낼 수 있게.

한국 와서 보니 여기는 그렇지 않더라. 참관일이 있긴 한데, 오는 부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문화가 다르다.


급식 메뉴는 비빔밥과 떡국

심장이 쿵 했다. '진짜? 일본 급식에?' 한국 음식이 나온다고? 일본 소학교 급식실에 오른 내 나라 밥. 일본에서 나고 자란 딸이지만 집에서 늘 한국 음식을 먹기에 비빔밥과 떡국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딸아이가 친구들한테 "이거 한국 음식이야" 하며 뿌듯해할 얼굴이 벌써 보였다. 기대했다. 많이.


일본의 소학교에는 한국 학교처럼 따로 급식실이 있지 않다. 밥과 국이 든 통을 가져와 각 교실에서 급식판에 급식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배급된 급식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아이들 앞 트레이. 저게 뭐지?

밥 위에 고기, 나물. 여기까진 맞다. 그런데 옆에 놓인 작은 그릇 안의 검정색 액체.

고추장이 보이지 않았다. 간장이었다. 아이들은 그걸 밥에 부어 비비고 있었다. 간장 비빔밥.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떡국'으로 보이는 국그릇. 맑은 국물이 아니었다. 미소된장국이었다. 떡 서너 개가 베이지색 국물에 떠 있었다.

'이게... 비빔밥? 떡국?' 좀 허탈했다.

고추장 없는 비빔밥. 된장국 떡국. 이름만 같은 다른 음식. 아이들은 다 먹었다.


참관 온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작은 방에 모였다. 교감, 영양사, 조리사.

영양사가 오늘 메뉴판을 펼쳤다.

"한국의 전통 음식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단백질 15그램, 채소 100그램, 나트륨은..."

숫자들이 나열됐다. 영양소, 칼로리, 조리 시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을 들었다.

"저기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왔다.

"저 한국 사람인데요. 말씀드려도 될까요?"

영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한국에서는요..."

목소리를 낮췄다. 비난처럼 들리고 싶지 않았다.

"비빔밥은 고추장으로 비벼요. 빨간 고추장. 그게 핵심이거든요. 그리고 떡국은 맑은 국물에 끓이고요. 오늘 나온 거랑은 좀... 많이 다르네요." 순간 방이 조용해졌다.


교감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 이해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차분했다.

"네 맞아요. 하지만 학교는 레스토랑이 아닙니다. 100명의 아이들이 모두 먹어야 해요. 고추장은..."

잠깐 멈춰 서더니 말을 이었다.

"너무 맵습니다. 일본 아이들 대부분이 매운 걸 못 먹어요. 급식을 남기면 오후 내내 배고픈 건 아이들입니다. 떡국도 마찬가지예요. 미소된장국은 이 아이들이 매일 먹는 맛이에요. 낯선 맛보단, 익숙한 맛에 새로운 재료를 더해 본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 애들도 그렇다. 한국 와서 닭갈비 시키면 꼭 물어본다. "엄마, 이거 매워?" 순한 맛은 다 먹는데, 보통 매운 맛만 나와도 반을 남긴다. 한국인 입맛에 '보통'인 게, 일본에서 자란 애들에겐 '엄청 매운' 거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기대했던 '비빔밥과 떡국'은 그렇게 끝났다.


며칠 전, 조승연님의 탐구생활 유튜브를 보았다. 일본 스시가 미국 가서 캘리포니아롤로 변한 이야기, 한국 갈비가 멕시코 타코에 들어간 이야기. 화면 속 사람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게 진짜 스시야."

"이게 진짜 타코지."

원조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는 그들이 먹는 더는 것이었다.

피자도 그렇다. 이탈리아 피자, 미국 피자, 한국 피자. 다 다르다. 카레도. 인도 카레, 일본 카레, 한국 카레.

일본카레는 더 갈색이다. 한국 카레는 노랗다. 어느 것이 진짜? 나는 인도 카레는 먹어본 적이 없다.

다 진짜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럼 우리 음식은?

비빔밥. 떡국. 불고기.

한국이 처음 만들었다. 한국음식이다. 맞다. 하지만 이것들이 바다 건너 다른 나라로 갈 때, 그대로 갈 수 있을까? 없을 것같다. 우리가 먹는 카레가 인도카레가 아닌것처럼. 고추장은 케첩이 될 수도 있다. 맑은 육수는 된장국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변질일까? 아니면 적응일까?

그날 급식실에서 본 '간장 비빔밥'과 '미소(된장) 떡국'.

그때는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저게 시작이었다는 걸.

일본 아이 한명이 간장 비빔밥을 먹으며 "이게 한국 음식이구나" 배운다. 미소(된장) 떡국을 먹으며 "한국에는 떡을 국에 넣어 먹는대"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크면 어떻게 될까? 일본 길거리의 한국 식당에 들어가 급식 때 먹었던 비빔밥을 기억하며 비빔밥을 부담없이 먹지 않을까? 고추장을 넣어서!


K-food.

세계로 나간다는 건 레시피가 퍼지는 게 아니다.

기억이 생기는 거다.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드는 거다.

우리 방식 그대로 가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다. 세상은 넓고, 입맛은 다 다르니까.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뉴욕 어느 골목에서, 런던 어느 거리에서, 파리 어느 광장에서. 한국 식당을 만날 수 있기를.

그 안의 비빔밥이 고추장이 아니어도. 그 안의 떡국이 맑은 국물이 아니어도.

간판에 'Bibimbap'이 적혀 있고, 'Tteokguk'이 적혀 있다면. 우리의 음식이 그들의 생활에 스며든면,

아쉽지만 그것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날의 당황스러움은, 이제 조용한 기대로 바뀌었다.

세계가 한국 음식을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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