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근처 도서관에서 전단지 하나를 발견했다. 오사카시 중앙도서관에서 10회에 걸쳐 여는 강의였다. 주제는 '아이들의 책 읽기'. 대상은 성인.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1년 10개월 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 30년 전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한국어로 된 육아 정보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나 엄마에게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 물어 볼 형편도 아니었다. 일본어 육아책은 있었지만, 술술 읽히지 않았다.
책이야말로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딸들이 책과 친해지기를, 나도 일본 그림책에 대한 안목을 얻기를 바라며 강의를 신청했다. 다행히 오사카시 중앙도서관은 자전거로 30분 거리였다.
9회 강의를 마치고 10회차 강의는 내가 사는 지역의 나니와구 도서관에서 있었다. 강의라기보다는 관장, 그리고 도서관 내 책 읽어주기 모임 리더와의 대화 시간이었다.
리더는 내게 책 읽어주기 자원봉사를 권했다.
"저, 외국인이에요. 한국 사람인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더는 괜찮다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자주 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이 될 때만 하면 된다고.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 장소는 나니와구 도서관이나 관내 유치원, 보육원, 초등학교였다.
즉답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어눌한 외국인 발음으로 일본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고? 읽다가 발음이 틀리면? 등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리더는 나보다 연장자로 여유 있어 보였고 신뢰가 갔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나의 걱정을 가라앉히며 격려해주었다. '외국인으로서 이런 일본 사람 한 명 알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 그림책과 친해지고 일본어 향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책 읽어주기 자원 봉사를 하기로 했다.
처음 간 곳은 관내 유치원이었다. 그날 시간이 되는 자원봉사자 3~4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할머니쯤 되시는 분, 나보다 젊은 20대 분, 그리고 리더와 함께. 각자 준비한 그림책을 아이들이 모여 있는 교실에서 읽어주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책을 잡은 손도, 목소리도 떨렸다.
그림책이니 글밥이 많지는 않았다. 집에서 읽고 또 읽었는데도 어색한 발음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つ' 발음. 한글로 하면 '츠, 쯔'에 해당하는데 혀의 위치가 달라서 우리 식으로 발음하면 일본인들에게 '주'로 들린다.
그림책을 한 손에 꽉 잡고 이야기에 맞춰 한 장 한 장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 그림책이 흔들리지 않게 내 몸에 밀착시키고 꽉꽉 쥐고 있어야 했다. 가로로 긴 그림책이 많다 보니 이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손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끝나고 나니 손에 땀이 흥건했다.
1시간 정도의 자원봉사가 끝나면 도서관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림책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듣고, 읽기 기술도 배웠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물론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듣고 말하는데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지만.
한번은 함께 간 할머니 자원봉사자에 대해 리더에게 말했다.
"어르신이 읽어주실 때 마치 우리 할머니가 옛날이야기 해주시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이들도 더 집중하는 것 같고요." 그러면서 물었다. "나는 왜 자꾸 빨리 읽게 될까요?" 리더는 답을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은퇴하신 분들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생활 자체가 여유롭다 보니 책을 읽을 때도 느긋하게 읽어주신다고.
그러면서 자신의 올케 이야기를 꺼냈다. "올케가 시집올 때는 무척 느리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는데, 직장생활, 가정생활, 출산 후 육아까지 하면서 빠릿빠릿하게 변했어요. 李상(さん)이 지금 한창 아이 셋을 키우고 있으니 식사, 청소, 아이들 돌봄 등 계속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책도 빠르게 읽게 되는 거예요." 'なるほど(그렇구나).' 너무나도 이해가 쏙 되는 설명이었다.
약 7년 정도 도서관 자원봉사를 했다. 이사를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자전거로 20분 이내, 한 번에 1시간 정도만 소요되니 큰 부담은 없었다. 다만 외국인이었기에 소리 내어 읽는 연습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그 덕분에 다양한 일본 그림책들을 접할 수 있었고, 용기 내어 책을 읽다 보니 일본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리더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책에 대한 도움도 많이 받았다. 가장 큰 수확은 딸들과 자주 도서관을 방문하다보니, 딸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つ' 발음은 끝내 완벽하게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외국인으로서 일본어 그림책을 읽어 줄 용기를 낸 나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