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살수록 멀리 보고 싶었다
일본 TV를 틀면 어디선가 반드시 수사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본방, 재방, 심야 재방까지. 채널을 돌리다 수사 드라마에서 늘 멈췄다. 일본 드라마의 용의자들은 한 명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두 명, 세 명, 혹은 연쇄. 배경도 도쿄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토의 골목, 홋카이도의 설원, 나가사키의 항구. 살인 사건을 쫓다 보면 덤으로 일본의 풍경도 얻었다. 일본어 공부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매일 수사물을 챙겨봤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추리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런 나에게 남편이 '수사 드라마 금지령'을 내렸다. 태교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때 나는 첫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추리물의 형사들은 꼼꼼하고 치밀하다. 단서 하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분 단위로 동선을 추적하고,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 드라마들이 그렇게 인기인 이유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닐까.
둘째 딸 소학교의 어머니 합창단으로 활동하던 때의 일이다. 학예회 발표가 있었다. 장소는 학교에서 지하철로 50분 거리의 오사카 콘퍼런스 대회장. 전날 저녁,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학교 집합 시간 → 지하철 승차 시간 → 환승역 도착 시간 → 다음 지하철 탑승 시간 → 도보 이동 시간 → 현장 도착 예정 시각'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위 지하철을 놓쳤을 경우: '다음 열차 시각 → 환승 시간 → 도보 이동 시간 → 최종 도착 예정 시각'
순간 숨이 막혔다. 분 단위까지. 놓쳤을 때의 플랜 B까지.
초행길 단원들을 위한 배려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대충대충이 체질인 나에게 그 메시지는, 폐소공포증 환자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라마 속 형사들이 살인 현장을 분 단위로 재구성하듯, 일상도 그렇게 촘촘히 짜여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물통을 들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물을 제공하지 않으니까. 매일 아침 보리차를 끓여 보냈다. AS 전화를 하면 3박 4일은 기다려야 했다. 어떤 때는 수리비와 시간을 따지다 결국 새로 사는 게 낫다는 결론도 나왔다. 아이들의 1년 치 세세한 학교 일정표는 학기 초에 배포되고 이에 따라 학부모들은 직장 스케줄을 미리 조절하여 대부분의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그럴 때마다 한국이 떠올랐다. 학교마다 정수기가 있고, 전화 한 통이면 기사님이 달려오는 나라. 멀리서 보이는 한국은 여유로웠다. 숨통이 트이는 나라처럼 보였다.
계획적이고, 정확하고, 매뉴얼대로 맞아떨어져야 돌아가는 사회. 17년을 그 안에서 살다 보니 한국의 느슨함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여백이 있는 사회. 어딘가 비워둔 사회.
그런데 막상 귀국하고 보니.
학교 일정은 직전에야 공지됐다. 우왕좌왕하다가 시간을 놓쳤다. 특히 참관수업에 참여하는 학부모가 소수인 것을 보고 놀랐다. 멀리서 보이던 여유로움은 가까이서 보니 조금 달랐다. 숨통이 트인다고 느꼈던 것이, 어떤 날은 그냥 구멍이 되었다. 좋아 보였던 여백이, 가까이서 보면 예측할 수 없음이었다. 그 순간 오사카의 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표. 그때는 숨 막혔는데, 왜인지 조금 그리웠다.
귀국 전 일본 엄마들과의 마지막 모임에서 한 일본인 엄마가 물었다.
"귀국하는 거 걱정되지 않아요? 북한이 있잖아요. 전쟁 위험 없어요?"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한국의 가족은 항상 저한테 물어요. 일본에 지진이 그렇게 많은데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 서로의 위험을 밖에서 보고 있었다. 당사자들이 이미 익숙해진 것들을. 멀리서 보면 위험해 보이고, 안에서 살면 그게 그냥 일상이 된다.
일본에 살면서 다양한 시간대의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온 지 하루 된 사람, 한 달 된 사람, 1년, 10년. 신기하게도 같은 나라를 보면서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사람은 도쿄가 최고, 후쿠오카 사람은 후쿠오카가 최고. 오사카에 살았던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오사카였다.
얼마나 오래, 어디서 봤느냐에 따라 같은 것이 달리 보인다.
멀리서 보면 실루엣만 보인다. 윤곽은 선명하고, 복잡함은 지워진다. 가까이 들어가면 뒤얽힌 것들이 보인다. 예상 밖의 것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윤곽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멀리서 보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가까이서 보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꼼꼼함은 답답했지만 믿을 수 있었다. 한국의 여백은 자유스러웠지만 가끔 구멍이 됐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됐다.
완벽한 거리 같은 건 없다.
욕심을 낸다면 멀리서 보는 눈과 가까이서 보는 눈을 동시에 갖는 것인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냥, 어디서 보든 다 조금씩 불편하고, 다 조금씩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