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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Jan 07. 2021

싫어하는 영화들: 1. 빌리 엘리어트(2000)

어떻게 범인이 빌리를 사랑하지?


잘 만든 것과 별개로 싫어하는 영화들이 있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개개인의 이유로 볼 수 없는 경우들이 있지 않은가. 가량 옛 연인이 가장 좋아했던 영화라든지, 혹은 안 좋은 일이 있던 시기에 상영 중이었다든지. 각자 개개인의 이유로 싫어하는 영화가 있을 테다. 그리고 그 영화가 다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어쩌면 무뎌졌을 때 우리는 인생의 산 하나를 넘은 거라고 봐야지.



그렇게 해서 오늘 얘기할 내가 싫어하는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다. 네가 알고 내가 아는 그 영화 맞다. 얼추 제목과 사진만 보여 주면 자기가 다 봤다고 착각하는 그런 종류의 명작 영화.



예전에는 이 포스터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거 같다. 뭐든 그러기 마련이지만.


그리고 미리 이야기해 둔다. 내가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빌리 엘리어트는 좋은 영화다. 어떠한 관점에서든 말이다.



잘 만든 영화이고, 그 안의 주제 의식은 피상에서 멈추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다.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자신의 꿈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피워낸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희대의 악마 대처(이건 영화 전반에 깔려 기술된다), 대처리즘이 불러온 신자유주의 속에서 실제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역설한다.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빌리와 다른 노동자들이 던지는 계란과 돌을 외면하며 탄광으로 가는 차에 오른 아버지 재키를 번갈아 보여준 프레임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모두 끝낼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80년대의 영국 현실을 비춘 영화 중에서도 수작에 뽑힌다.



근데 나는 왜 이 영화를 싫어할까.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걸 싫다고 얘기하는 홍대병에 취해서일까? 나는 빌리 엘리어트를 딱 두 번 봤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고, 보지 않을 예정이다.



이건 영화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그 문제점이 내게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처음 본 건 중학교 때. 그때는 그냥 빌리가 불쌍하고 응원할 대상에 불과했다. 어린데 하고 싶은 거 부모님이 시켜주지도 않고 처맞고만 다니잖아 애가. 그리고 3분의 2쯤 보다가 잤다. 그때 내가 더 재밌게 본 건 빌리 엘리어트가 아니라 뭐 스윙걸즈, 노다메 칸타빌레, 페넬로피 이런 거라서... 재미있다고 생각을 안 한 거지, 그때는. 그 이후로 다시 볼 생각도 안 했다. 세상에 볼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보다 만 영화를 다시 보려고 하겠는가.



그러던 내가 다시 보게 된 건 교육적인 이유에서.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한창 학점에 대가리 돌아서 살 때 24학점을 살인적으로 꽉꽉 채우고 졸업 학년에는 절대 교양을 듣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봉사까지 신청했었다. 그렇게 하게 된 봉사는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사이의 학생의 멘토가 되어 공부를 봐주거나 학원 가기 전까지 놀아주는 역할을 하는 거였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림 그리기나 국어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학생과 떠들다가 집에 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학기 말이 되니까 그것마저 지쳐서 만나면 일단 대뜸 영화나 틀어줬다. 어머님과 봉사 주관을 해 주신 수녀 회관에게는 너무너무 죄송하지만... 어쨌든 대강 각설하고 그때 틀어준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빌리 엘리어트였다. 몰라 왜 하필 그거여야 했는지. 내 기억이 맞으면 교육용 추천 영화 중 하나였다. 빌리 엘리어트. 나는 그걸 지루해하는 학생 옆에서 같이 앉아서 끝까지 봤다. 우리 초등학생 친구보다 내가 더 열심히 봤다. 과제를 하려고 했는데 아가리 벌리고 그거나 빤히 봤다.



재키의 눈물을, 빌리의 재능을, 토니의 절규를 봤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서 학생한테 손바닥 인사 지리게 하고 나와서 담배를 존나 뻑뻑 폈다. 학부모랑 마주칠 수도 있었는데 뭔 정신인지. 다시 떠올리면 미쳤던 게 틀림없다. 근데 그때는 담배를 안 피우면 죽을 거 같았다. 도통 정신이 안 차려졌다. 빌리가 춤추는 모습, 재키가 빌리를 혼내는 모습, 부모님과 갖는 갈등 관계. 하지만 결국 내려오는 사랑. 거짓말처럼 이루어지는 꿈. 감격에 눈물을 흘리는 재키. 떠올린 생각이 뭐냐면, 아 보지 말걸 이거 하나.



그리고 결론.



우리 부모님은 재키인데 나는 빌리가 아니다.



그게 내가 빌리 엘리어트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이고 단 하나 뿐인 이유다. 어렸던 나는 빌리가 아니고 빌리였던 적도 없다. 하지만 내 삶에서 나의 부모들은 언제나 재키였다.



그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부터 재키였다.



왓챠에서 빌리 엘리어트 코멘트를 보면 첫 코멘트가 이렇다. 돈 없는 집안의 재능 많은 자식은 불효자다. 단언컨대, 이건 헛소리다. 재능 많은 자식은 불효자가 아니다. 왜냐고? 재능이 많은 아이들은 언젠간 된다. 그 언제를 확신할 수 없는 것도 미안할 일이지만 그들은 언젠간 되고야 만다. 3000년 세월이 못을 박아버린 진리다. 그럼 불효자는 누군가? 나처럼 재능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함 배팅하고 카드 뒷장 까 봐야 아까비 로우였네 하는 놈들이야 말로 불효자다.



천하의 불효자, 둘도 없는 패륜아 그런 거.



나 자신을 싫어하기 싫어서 오래오래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진실인데 고작 110분짜리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가 그걸 싹싹 긁어서 다시 눈 앞에 던져놓는다. 근데 내가 어떻게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까, 이걸. 어떤 너무 좋은 영화는 사람의 속을 냅따 긁어놓고 좋다고 웃고 크레딧을 올려버린다. 그럼 남아있는 사람은 뭘 하지. 내 긁혀서 꿀럭거리는 속은 어떡하면 좋지.



그냥 남겨진 대로, 그 좋은 영화는 좋은 영화인대로. 하지만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다. 보지 않는다. 좋은 영화이지만 보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하여간, 이래서 예술가들이 싫다. 자기들은 그저 화두를 던질 뿐이라며 시한폭탄을 투척하고서는 남겨진 폐허는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 나는 피난민이자 포로가 되어서 지치고 힘든 몸을 달랠 곳을 찾아 떠돈다.



그게 또 다른 영화일지 실제의 집일지 꿈일지 어쩌면 이상일지 저 문 밖일지 ...



모르겠다. 그리고 알 수도 없다. 영영 모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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