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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Jan 08. 2021

싫어하는 영화들: 2. 500일의 썸머(2009)

망한 사랑에 이끌리는 이상한 심리





기왕 이렇게 된 거 싫어하는 영화들이라는 주제로 쭉 글을 써 볼까 한다. 싫어하는 영화라는 주제도 참 흥미롭지. 좋아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싫어하는 영화는 참 많다.



사람은 타협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미덕이라는 거지.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내가 재밌어서이다. 어떠한 방대한 목적도 이루고자 하는 야망도 없다. 항상 이렇게 기록하고 나중에 읽으면 재밌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가능성이 있는 일기 정도일까. 그리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랑 같은 이유로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꽤 행복할 거 같다.



그래서 오늘 내가 싫어하는 영화는 500일의 썸머. 이미 시네필들을 상대로(나는 시네필이 아니다.) 꽤나 악명이 높은 영화다.



먼저 알아 둘 것은 이건 사랑 얘기가 아니란 거다.
(500) Days of Summer

2016년 재개봉 포스터(왼쪽)    2009 개봉 포스터(오른쪽)



영화는 로맨스 코미디의 장르를 달고서 저런 요상한 대사로 포문을 연다. 가슴 찌르르하게 만드는 둘의 썸과 조셉 고든레빗의 빛나는 얼굴, 그리고 영화가 주는 청량함과 그 색감,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쓰는 시간 전개 방법이 장점일까. 그에 반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로맨스, 어영부영 찾아오는 새 사랑. 그래. 둘의 사랑 얘기가 아니라서 아니라고 한 거다. 거기다 그 새로운 사랑의 이름이 어텀이라는 점이 정말 촌스럽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다. 썸머는 희대의 어장녀다. 톰이 너무 답답하다. 저런 남친/여친 있으면 기절하고 싶을 거다. 썸머 시점으로도 나왔으면 좋겠다. 혹은 톰! 썸머도 너를 좋아했어! 어쩌고 저쩌고. 우왕좌왕 할 부분이 아니긴 하지. 내 입장에서 둘은 사랑을 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그 시선과 그 손 끝의 떨림과 둘이 나눈 말들과 온도가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냔 말이다. 썸머가 확신을 주지 못 했다고? 톰이 썸머의 마음을 알아 주지 못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감정은 확신과 주고 받음의 영역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냥 터져나오는 호르몬에 의해서 그러한 상태가 되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둘은 사랑을 했다.



 둘이 나눈 건 사랑이다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앞서서 벌려놓은 문장들이 이건 사랑 얘기가 아니라고 했거든. 저건 어장이다, 아니다 부담스러워서 한 발 물러선 거다. 알아주지 못 한 톰의 잘못이다. 아니다 말을 안 하는데 대체 어떻게 아냐. 다 맞는 말이다.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 둘이 한 사랑이 망한 사랑이라는 점을 깨우치고 나면 모든 게 해결이 된다.



망한 사랑. 나는 망한 사랑을 정말이지 너무 좋아한다. 모든 사랑은 망하기 때문일까? 지지고 볶고 울고 불고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내일 안 싸울 자신이 없는 사랑. 모진 말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도 상대가 없는 내일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 그런 걸 보고 있자면 팝콘이랑 맥주가 술술 넘어간다. 나의 유구한 안주들. 진짜 잠깐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좋아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망한 사랑을 좋아한다면서 왜 500일의 썸머를 싫어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망한 사랑이 끝난 타이밍에서 서로 새 사랑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톰의 새 사랑 어텀


영화적 완결성, 보여 주고자 하는 의의, 뭐 그런 휘황찬란한 것들에 의해서 영화가 싫은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그게 톰과 썸머 간의 이야기이길 바랬던 거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텀과 썸머의 남편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둘 만의 이야기이길 원했다. 그 둘이 뭐 어떻게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랑을 다시 붙여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바보같은 짓을 또 하려고 꾸역꾸역 달려들고. 한 번 크게 다친 다리는 언제든 다시 다칠 수 있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또 달리고 발목을 접지르고 ... 그냥 그러길 바랬다. 하지만 감독은 둘이 새로운 사랑을 찾으며 가치관을 바꾸고, 서로의 인생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럼 둘의 이야기는 영영 끝나버리지 않나. 그들 인생에서 아, 내가 살아갈 때 그런 애가 있었지. 그 정도의 관계로 끝난다는 걸 나는 납득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톰이 어텀과 사랑하게 만들어라. 처음부터 썸머가 도리안 그레이에 대해 질문을 해 주는 남자에게 반하게 만들어라. 둘의 관계에 몰입하게 만들어버리고선 새로운 사랑을 하게끔 떠나가게 하는 거. 나한테 너무 예의없는 거 아닌가? 얘네 둘이 헤어지고 다른 사랑을 하러 가도 괜찮을까 정도는 나한테 물어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물어봐도 허락해 줄까 말까인데 맙소사. 그래서 앞에서 사랑 얘기가 아니라고 했던 거라면 기만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 스토리.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말은 이런 감상을 낳는다. 남들이 어쨌든간에 나는 그랬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년에 4번 가량, 어쩌면 6번씩 500일의 썸머를 다시 보곤 한다. 답답하고 거지같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런다.



어쩌면 마크 웨브는 이걸 노렸을지도 모르지. 결국 뒤져라 욕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신랄하게 비난을 하면서도 여름이 되면, 어쩌면 또 다시 사랑을 하면. 내 망한 사랑이 끝나면 불현듯 떠오르길 바라면서 500일의 썸머를 제작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나는 500일의 썸머가 싫다. 영상물에서 조차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망한 사랑이 좋으면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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