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쉬는 날이지만 내일의 영업 준비를 위해 새벽 첫 전철을 탔다.
출근길 전철은 내게 30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선물로 준다.
귀한 선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잠을 자든 명상을 하든 멍 때리든 글을 쓰든 오디오북을 듣든 종이 책을 읽든 하루 계획을 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오늘은 넷플릭스 영화를 보려다가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펼쳐 들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다음 역에서인가 맞은편 자리에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줌마 두 분이 탔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인지.
그들은 시종일관 다투었다.
딴에는 소리 죽여 싸웠지만 도리어 귀가 아팠다.
아, 당신들 뭔데 내 귀한 독서 타임을 방해하는 거야?
안타깝게도 내겐 지하철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을 이겨내면서 계속하여 책을 읽을 수 있는 집중력이 없다.
몇 번인가 그들을 째려보았지만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옆자리의 아저씨는 다른 자리로 도망을 갔다.
참을성 없는 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원인 제공자에게 주의를 준다.
오늘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좀 조용히 갑시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휴일 아침의 신성하고 발랄한 내 기분을 하찮은 그들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서다.
결국 나는 책을 덮고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 영화를 틀었다.
내릴 때 생각하니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내 기분도 그들의 기분도 망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정말 잘못했다.
누구에게도 제지받지 않고 마음대로 떠든 그들은 또 지금 어디선가 일요일의 아름다운 공기를 오염시키고 다닐 테니 말이다.
가게로 향하며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
오늘은 무엇인가에 탐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부끄러운 기억은 싹 지운 건지, 어린이 시절에는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런!
생각해 보니 욕심 낸 것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계란부터 시작해서 바나나, 아이스크림, 과자까지...
먹는 것에 참 과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에는 많이 먹기보다는 입맛에 맞는 음식을 탐한 것 같다.
음식만 탐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욕심을 부린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친구의 머리를 탐했고,
오락시간에 태연하게 끼를 발휘하는 아이의 끼를 탐했고,
노래를 잘 부르는 그의 재능을 탐했고,
너무 멋진 그의 얼굴을 탐했고,
너무 많이 가진 친구의 환경을 탐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어중간한 것이 문제였다.
노력을 안 한 것이 문제였다.
공부는 제법 했지만 1등인 것은 아니었고
운동도 잘했지만 어느 종목 하나라도 반 대표 레벨은 아니었다.
모든 분야에서 임계점을 넘지 못했다.
특히 글쓰기는 너무 아쉽다.
학창 시절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기고만장하며 어깨에 힘만 주었지 너 나아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글쓰기를 지속하지 않았고 어느 시기부터는 독서도 멀리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
원하는 책을 갖고 싶어 했다.
그렇게 산 책 중에는 읽지 않은 책이 수두룩했다.
그건 읽겠다는 마음이 아니고 갖겠다는 욕심이었다.
탐독이 아니라 탐서였다.
이런 욕심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단지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가져도 곧 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
읽은 책을 서가에 꽂아두고 눈으로 즐기는 욕심은 버렸다.
소장 서적이 몇 권이라는 교만의 태도도 버린 지 오래다.
그렇지만 마음에 든 책을 갖겠다는 욕심은 대체 왜 사라지지 않을까.
그건 아주 유별난 탐욕이다.
나는 옷에 대한 욕심도 없다.
미식에 대한 욕심도 없다.
물론 식탐은 나이 들면서 노욕의 하나로 찾아와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노욕 중의 하나가 식탐이라는 건 서글프다.
게걸스러운 식탐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아무튼 책을 가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가진 책을 외면하지 말고 열심히 읽을 일이다.
*
마을 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취미 교실의 수채화 강좌에 등록했다.
4~6월의 3개월간 매주 토요일 수업이 있다.
들어보지도 못한 물감과 붓과 기타 뭔지도 모를 재료를 준비하여 오라는 안내글에 등록을 망설였지만 아예 처음인 사람은 4B 연필과 스케치북만 가지고 오면 된다는 소개글 말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덜컥 신청 버튼을 눌렀다.
이럴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작하자마자 도망간 수업이 내 삶의 역사에는 적지 않다.
이번에도 과거의 전철을 밟으면 어찌 하나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배우고 싶다.
그냥 기초만 배우면 된다.
이후에는 자기만족으로 충분하다.
탐하는 마음은 이럴 때 필요한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를 망치지 않는 탐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미칠 듯한 욕심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