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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도 May 05. 2024

식당의 탄생

33. 선한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 1


  대학 입시에 애쓰던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1985년 즈음의 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 년 전의 일.

노량진 종합반 학원의 영어 선생이 한 말을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위선과 통한다."


 이어진 일련의 해프닝으로 선생에게 실망도 하였지만, 어린 마음으로 오랫동안 그가 한 말을 신봉했습니다(난 참 바보).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뼛속마저 인격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란 위선과 인격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동물이라고 말이죠.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는 그만큼 두터운 위선의 탈을 쓴 이중적인 인간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 생각이 변한 건 아닙니다. 단지 위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때로는 위선자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보다 더 인간적일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의 관점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결론은, 인격이건 위선이건 따지지 말고 가리지 말고 나를 위해 또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자는 것. 그런 면에서 자영업자는 자기 주도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펼쳐 나가기에 제법 유리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특히 월급쟁이 직장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선 활동의 무대에 있어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저의 생각.


  그래서 우리 자영업자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 참여의 방식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식당을 하면서, 자영업을 영위하면서 누구보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 그보다 더 근사한 일이 또 있을까? 실은 가게의 사장님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기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식당의 사장님이라면 당장 사업장 주소지의 관할 주민센터를 찾아가 이웃 돕기를 신청하여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보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누군가를 한 끼 식사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쉽지 않을 경우, 누군가를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을 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돕는 것은 큰 금액의 돈이 아니어도 당연히 오케이. 그저 주위를 둘러보는 마음이 필요할 뿐이지요.


  저희 마스터낙지는 2020년 연말에 결손가정아동 돕기 성금을 모금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맛있게 식사하러 오시는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지요.


  모금 과정 중에서는 놀라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슴 벅찬 일 하나.

 가게 앞에 성금함을 놓고 3일이 지났습니다. 처음 3일 동안 모인 돈은 0원. 아무도 성금을 안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 부부가 매출의 일정액을 기부할 것이기에 괜찮다! 하면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째 저녁에 초능력자에게(사실은 저 자신에게) 감히 단언했습니다. 분명히 단 한 명이라도 성금을 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흘째. 점심 영업을 마치고 난 저희 부부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 성금을 내주신 겁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반전은 바로 그 성금의 주인공. CCTV로 확인한 그분은 저희 가게의 단골 고객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단 한 번도 식사를 한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배달 라이더 아저씨!


주문한 음식을 찾으러 온 라이더 아저씨가 모금함에 돈을 넣었던 겁니다.





  

사회적 공헌은 마음의 여유로부터


  식당을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재료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고 정리를 하고 다시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몸만 바쁘고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기다리며 쌓여가는 긴장감과 만인만색의 손님을 대하느라 지치고 피폐해진 영혼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여유를 잃었습니다. 더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순간의 휴식과 함께 여유가 찾아와도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정신없이 바쁜 것이 나았습니다.


  그런 긴장감 백배의 하루하루에서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그저 생각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가게에서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구상하다가 더불어 불우이웃 돕기 행사도 해보자는 생각. 그냥 저희 부부 둘이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들과 함께 하면 더 좋지 않을까. 물론 시작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티 내는 것이 아닌가, 괜히 번거로운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구상을 접을까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조용히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강요할 것도 너무 요란스럽게 선전할 것도 없다는. 모금 기간 동안 참여가 없으면 그냥 두 사람이 작은 정성으로 이웃을 도우면 그만.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모금에 감동으로 만난 사람이 배달 라이더 아저씨였습니다.











  이제 또래 친구들이 하나둘 은퇴하는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들의 은퇴 행렬을 보면서 그들보다 앞서 은퇴하고 그들보다 앞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식당의 일에 익숙해지니 아프고 쑤신 것도 초보 시절보다는 덜합니다. 일도 전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인은 못 되었지만 숙련공은 된 듯한 느낌.

아무튼 마스터낙지로 육체노동은, 근로소득은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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