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판도 Sep 08. 2024

장막을 걷어라

여름 여수 그리고 바다와 섬

   

  창밖의 바다는 물을 제법 머금은 먹으로 풀어놓은 흐릿한 수묵화다. 하늘도 바다도, 그들을 감싼 안개도, 모든 것이 아스라하다. 그 사이사이로 진하고 작은 몇 개의 물체는 밤새 그 자리에 머물렀을 화물선 따위 배들이었다. 물결은 잔잔하고 그들은 미동도 없다. 마치 그림처럼 말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갈 수 없는 곳, 아름다운 여수를 한탄하듯 노래했다고 한다(당시 이규보는 몸이 아팠다고).



여수는 나라의 남쪽 끝


하늘처럼 멀어 꿈꾸기조차 힘이 드네


이 몸이 꼭 가 보고 싶은 마음뿐인데


어찌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있으려나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여수행 고속버스를 탄다. 버스는 오전 8시 정시에 출발. 앞으로 4시간을 달리면 '아름다운 물의 도시', 여수(麗水)다.


  한 시간이 지나 9시.

남행길의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국도로 우회하겠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렇지, 8월 하순의 토요일은 아직 괜찮은 막바지 여름 휴가 시즌인 것이다. 누구든 몇 조각의 남은 여름을 즐기려 함은 당연지사요 인지상정.


  국도에 들어섰다.

이곳도 막히기는 마찬가지.

출발하며 버스에서 마시기 시작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잠을 쫓고 화장실을 부른다.

그런데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다시 얼마나 달렸을까.

휴대폰을 보고 책을 읽으며 버티다 잠이 들었다(역시 책은 내게 수면제가 맞다). 한 시간 남짓을 잤다. 이제 여수까지 남아 있는 시간도 한 시간.

  고속도로가 한산하다. 주위를 맴돌던 그 많던 차와 그 속의 사람들 모두가 사라졌다.


  섬진강을 지나며 드디어 남도 여행이 실감 난다. 국토의 남으로 향하는 여행의 설렘이 마냥 즐겁고 짜릿하다. 다시 책을 집어 들었지만, 읽으려 하면 이내 터널 속이다. 남도 지방에도 강원도로 향하는 길만큼이나 터널이 많았다. 터널이 많다는 건 산이 깊고 많다는 이야기리라.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짙은 녹음이 가득하다.

  참 좋은 시절의 남도의 땅이 아름답기만 하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멀어지는 만큼 원망도 아쉬움도 깊어진다. 여수가 경기도 어디쯤이면 얼마나 좋을까.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여수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꽤 많은 구경과 활동을 하였다.


  낮 12시 20분, 여수종합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찾은 곳은 하모샤브샤브로 유명하다는 당머리첫집.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벼르고 먹어 본 음식에 비하면 감흥이 부족하다. 하모가 비싼 해산물이라 하니 시비 걸지 말고 넘어가자. 다음에 또 먹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정중히 사양하련다.



  돌아보니 기대했던 것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한편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놀라고 감탄하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숙소에서 바라보던 여수 바닷가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과(여자는 숙소도 좋아라 했다), 짧은 만큼 강렬하고 황홀했던 석양 풍경 속의 해상케이블카. 그리고 우연히 마주한  현란한 조명과 웅장한 음악 속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생동감 넘치던 분수쇼.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모이핀 카페(모이핀은 '안녕 핀란드'라는 말이란다)와 그곳 전망 좋은 테라스에서 바라보이던 작은 섬들까지.


카페 모이핀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

  

  나는 한때 광활한 중국 대륙을 누비며 그곳의 거대한 풍광에 놀라고 부러워했다(중국 각 지역의 품질 좋은 물건을 찾아내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일을 했다). 호주는 더 좋았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육체노동은 힘겨웠지만 숲 속에 던져진 내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일본도 좋았다. 어학연수로, 출장으로, 여행으로 찾을 때마다 마주치는 아기자기한 문화와 의외로 스케일 큰 그들의 현대 건축물과 과거의 유적이 부러웠다.


  그런데 미처 몰라 보았다. 그곳들이 따라올 수 없는 내가 나고 자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물론 솔직히 아직도 세계 방방곡곡 가고 싶은 곳 천지다. 그러나 우선은 몰라본 우리 땅 곳곳을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가슴에 품으며 감탄하고 찬양하리라. 장막을 걷어내고 내 나라 내 땅을 다시 보게 된 것. 여름날, 여수가 내게 준 깜짝 선물이다.


여수 엑스포 공원의 분수쇼



작가의 이전글 식당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