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을 직면하며, <엔들링스>

2025.5.20~2025.6.7,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by 임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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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들링스’는 각 종의 마지막 남은 개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연극 <엔들링스>는 미국 사회에서 멸종위기종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생태계에서 하나의 종이 멸종된다는 것은 해당 종의 개체 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인간 사회에서의 멸종은 한 집단이 사라지거나 지워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엔들링스>는 평균 연령 80대의 해녀들과 한국계 이민자 하영을 멸종위기종으로 본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과도 같은 해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매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상기해야만 하는 하영의 삶을 바라보고, 재해석한다.

캐나다를 거쳐 미국의 맨해튼에 살고 있는 한국계 이민자 하영은 극작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양인이라는 인종적 특징을 이용해 성공하는 것이 싫어 백인이 등장하는 ‘백인 연극’을 집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지만, 결국 백인들에게 떠밀려 한국의 해녀에 대한 공연을 쓰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해녀들의 이야기는 하영의 현실과 교차하고 공존하며 어딘가 이상한 형태를 띠게 된다. 난데없이 할리우드를 칭송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든지,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닌 달러라든지, 시아의 ‘샹들리에’나 ‘주말의 명화’ 주제곡 등에 맞추어 해녀들이 춤을 추기도 한다. 이처럼 당황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장면들은 하영이 느끼는 정체성의 충돌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백인들의 인정을 받고 싶으면서도, ‘백인’스러운 인정은 받고 싶지 않은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적인 정서가 전면에 드러난 장면이 아니더라도, 하영과 해녀들 사이의 연결점은 다양하다. 매일 깊은 바다 속에 뛰어들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해녀들과 몇 푼의 돈에 흔들리는 얄팍한 정체성과 입지를 지켜야 하는 하영의 삶은 매일이 생사를 오가는 투쟁이다. 이들은 습관처럼 자신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기를 염원한다. 이들의 삶은 매일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매일이 멸종위기와 다름없다. 당장 죽은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기에 이들의 삶은 유일무이하면서도 위태롭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삶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입지가 중요하다. 해녀들과 하영은 모두 섬에 살고 있다. 해녀들은 한국의 작은 섬 만재도에 살고 있고, 하영은 미국의 중심지 맨해튼에 살고 있다. 두 지역은 번화한 정도, 인구 등 수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립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해녀들과 하영의 삶을 형상화한 것처럼, 이들이 사는 공간 역시 고립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해녀들은 육지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셋만의 외로운 삶을 이어가고, 하영은 번화한 도시 속에서 외딴 섬처럼 혼자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부동산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극 중 부동산은 여러 맥락으로 사용된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소유하고 거주하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이나 입지, 나아가 심리적으로 안전한 보금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언제나 위태로운 관계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온전히 안도할 수 있는 공간이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은 온전히 자신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부동산’을 넓히는 것을 꿈꾼다. 자신을 확장시켜 온 섬을, 세계를 덮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다만, 극 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용어들이 잘 맞물리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여러 상황에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부동산’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 나아가 공연의 핵심적인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해녀와 하영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둘은 멸종위기종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엮여 설명되고 있지만, 서로 연관 지었을 때 그 연결점이 설득력 있지 못하다. 일례로 해녀의 절대적인 수가 적고 평균 연령대가 높기 때문에 멸종위기종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이민자인 하영이 비슷한 맥락에서 멸종위기종이라는 설명은 적용하는 것이 어렵다. 하영의 경우 이민자로서 정체성이 연약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비유로 해석해볼 수 있으나, 이 같은 해석이 해녀의 서사와 잘 맞닿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피상적인 감정적 연결고리로만 이어진 공통점은 관객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 극에서 잘 기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는 단어는 극중극인 해녀 연극이 백인에 대한 굴복 이상으로 기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오리엔탈리즘에 버금가는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해녀들의 삶은 백인들이 상상하는 모습일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해녀 서사를 통해 백인 사회에서 이민자가 겪는 딜레마나 어려움이 드러났다기보다는, 그들에게 굴복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극의 중심 주제와 연출이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갑자기 등장한 진주를 통해 다소 몽환적이고 낙관적인 해결책을 찾은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잘 조명되지 않던 동양계 이민자 서사에 집중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백인 사회 속에서 이민자가 느끼는 정체성 혼란과 인정 욕구를 솔직하게 마주 보려는 시도는 이민자가 느끼는 어려움에 집중한 보통의 서사와 차이를 가진다. 나아가 언급했던 혼란을 재치 있는 장면들로 힘 있게 밀고 나간 연출 또한 인상적이었다. 번역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 느낌이 사라진 ‘백인’스러운 언어를 자막의 흰색 박스를 통해 표현한 부분이나, 무대 세트를 회전하여 극의 배경을 바꾸는 장면에서는 연출적 고민이 돋보이기도 했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으나 백인 중심의 사회 속에서 동양인 이민자가 겪는 정체성의 분열을 재치 있게 풀어낸 공연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로 이민자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관객들이 느낄 혼란을 부인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모습은 이민자 개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을 그대로 체험하게 한다. 혼란 속에서 각자 다른 공간과 언어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엔들링스>는 멸종위기를 연장시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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